더글러스 레인스포드 톰킨스(Douglas Rainsford Tomkins)는 몽상가였다. 그의 꿈은 자연 보호가 아닌 자연의 복원이었다. 이미 병들어버린 땅, 보호는 헛되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잘해봐야 증상을 잠시 완화하거나 지연시킬 뿐. 그나마도 자연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거였다. 그는 뭇 생명을 자연으로서 사랑했지만, 인간만큼은 반(反)자연이었다. 자연과 항구적으로 공존하기엔 인간은 못 믿을 존재였고, 또 너무 많았다. 그가 지구 땅끝, 인적 드문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막한 숲과 초원과 화산과 습지와 강과 피요르드 해안에 제 꿈의 거처를 마련한 까닭이 그거였다. 220만 에이커(약 27억 평), 서울 면적(1.8억 평)의 15배. 그 땅은 자연의 피난처가 아니라 수복의 거점이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더글러스 톰킨스가 1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교실보다 암벽이 좋다”
어린 시절부터 등산ㆍ스키 마니아
명문 학교서 문제아로 잇단 사고
퇴학 후 美 서부ㆍ알프스 누벼
더글러스 톰킨스는 1943년 3월 20일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뉴욕 밀브룩에서 자랐다. 돈 잘 버는 골동품 상인이던 아버지는 그를 코네티컷의 명문 사립학교에 보내지만 그는 사고뭉치였다. 12살 때부터 답답한 교실보다는 뉴욕 주 남부 샤완건크(Shawangunk) 산군의 암벽이 더 좋았다는 그다. 15살 무렵에는 이미 등산ㆍ스키 마니아였다. 이런저런 사고를 치던 끝에 학교에서 잘렸다. 그에게 퇴학은 해방이었다. 곧장 현장 환경운동단체인 ‘시에라클럽’에 가입해 미국 서부의 온갖 데를 신나게 누볐고, 성년도 되기 전인 17살에 집을 나와 콜로라도 아스펜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꼭 1년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그는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가 주로 머문 곳은 피렌체나 파리가 아니라 알프스와 피레네의 암벽과 설원이었다. 돈 떨어져 돌아온 게 스무 살이던 63년, 고른 일자리가 시에라네바다의 타호 호수 산림감시원이었다. 그리고 그 해,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한 여자를 만난다.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에스프리(Esprit)’의 창업자 수지 러셀(Susie Russellㆍ자유주의 정치후원재단인 ‘수지 톰킨스 부엘 재단 설립)이었다. 둘은 이듬해 결혼,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생계수단으로 노스페이스 창업
아웃도어 라이프 대중화에 기여
첫 아내도 에스프리로 대성공
경영 불화로 이혼… 사업과도 결별
먹고 살자고 차린 게 64년의 ‘노스페이스’였다. 돈도 기술도 졸업장도 없었지만, 아웃도어 장비 하나는 남 못지않게 알고 써본 그였다. 빌린 돈 5,000달러로 유럽의 좋은 장비들을 수입해서 팔던 ‘노스페이스’는 지인들의 투자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내한 온도 표시 침낭, 다운 점퍼의 원조 격인 ‘시에라 점퍼’, 중간 기둥을 없앤 돔형 텐트…. 20세기 아웃도어 라이프의 대중화를 이끈 저 장비의 혁신은, 물론 타인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가능했던 거지만, 먼저 톰킨스 자신의 갈증에서 비롯된 거였다.
60년대 미국의 청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싫은 세상을 바꾸려고 덤벼든 이들과 세상이 싫어 아예 등 돌리던 이들. 후자 덕에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맹렬한 후자가 또 그였다. 톰킨스의 유별난 이력 중에서도 가장 돌출적인 사건을 벌인 게 그 무렵, 그러니까 ‘노스페이스’의 명성이 제 이름 아이거 북벽처럼 솟구치던 68년이었다. 회사를 동업자들에게 맡긴 채 톰킨스는 친구들과 함께 낡은 포드 밴을 타고 남미를 종단해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등정에 나섰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상에 담았다. 산악 컬트 무비의 고전으로 꼽힌다는 그의 유일한 영화 ‘Mountain of Storms’는,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한 국제어드벤처필름상을 수상했고, 2010년 크리스 멜로이(Chris Malloy) 감독의 새 다큐 ‘180 Degrees South: Conqueror of The Useless’의 모티브가 됐다. 2010년 영화는 등반가 제프 존슨이 톰킨스 등의 68년 여정을 되짚어가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그가 파타고니아를 누비고 다니던 무렵 아내 러셀은,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부엌 식탁 위에서” ‘에스프리(처음엔 ‘Plain Jane’)’를 창업했다. 톰킨스가 단돈 5만 달러에 모든 지분을 넘기고 노스페이스를 떠난 건, 그 이듬해인 69년이었다.
중고 폭스바겐 버스 노점으로 시작한 ‘에스프리’가 20년 사이 연 매출 10억 달러의 거대한 패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데에 톰킨스가 직접 기여한 바가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다만, 상품디자인과 판촉 등은 몰라도, ‘에스프리’의 젊고 새롭고 진취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기업 이미지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이끈 게 그였다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 획기적인 사원 복지, 예컨대 무료 외국어 교육이나 환경 캠프, 히말라야 트레킹과 래프팅 여행 등으로 ‘에스프리’는 의류 패션과는 별개의, 기업의 패션을 일구며 뉴 히피세대의 새로운 에스프리를 자극했다. 요컨대 그는 돈을 번 게 아니라 돈을 씀으로써 사업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어느새 거대 다국적기업이 된 회사의 경영진 및 출자자들과 툭하면 부딪치곤 했다. 톰킨스 못지않게 등산ㆍ트레킹을 즐기고 자연을 사랑했던 러셀과의 불화도 80년대 중반 이후 심화했다. 89년 둘은 이혼했고, 그는 1억 2,500만 달러와 동아시아 지사 지분 25%(약 2,500만 달러)를 받고 ‘에스프리’와도 결별했다. 46세의 그에게 그 결별은 도시ㆍ문명과의 결별, 사업ㆍ자본주의와의 결별, 한 생과의 급진적인 결별이었다.
생태주의 각성에 南美 끝으로
가치관 공유한 크리스와 재혼 뒤
27억평 구입해 자연 그대로 복원
국립공원으로 관련국들에 기증도
톰킨스의 80년대는 새로운 생태주의적 각성의 시기였다. 그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서부터 게리 슈나이더에 이르는 다양한 이들의 에세이와 시를 게걸스럽게 읽었고, 생태주의 활동가들의 강연과 캠프라면 열일 제쳐두고 찾아 다녔다고 한다. 인간중심주의 자연관을 비판하며 ‘Deep Ecology’의 이념을 주창한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Naess, 1912~2009)와의 만남, 조지 세션스(George sessions)와 빌 디벌(Bill devall)의 공저 ‘Deep Ecolocy’의 독서 체험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인간은 생존의 필요와 무관하게 자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 인구가 너무 많다는 각성, 자연을 살리자면 경제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 한 마디로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는 깨달음.
그는 1994년 ‘딥에콜로지 재단(DEF)’을 설립하고 칠레 차카부코 계곡 푸말린(Pumalin)의 20만8,000에이커(약 2억5,000만 평)의 땅을 사서 정착한다. 그 해 재혼한 크리스 맥디비트 톰킨스(Kristine Mcdivitt Tompkins, 1950~)와 함께였다. 오만하고 고집 센 이분법 원리주의자 톰킨스가 전적으로 믿고 기댄 단 한 사람이었다.
크리스는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총괄매니저(75~79)와 CEO(79~93)를 지냈다.그는 창업자이자 모험가이고 열렬한 환경보호론자인 이본 쉬나르(Yvon Chouinard, 1938~)와 더불어 ‘파타고니아 스타일’이라는 기업 신화를 일군 주역이었다. 암벽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손해를 무릅쓰며 최초로 출시한 재활용 알루미늄 초크, 재활용 종이 카탈로그, 상품 포장 최소화, 유기농 면 전면 사용, 1980년 업계 최초 연 수익의 10% 환경 기부(earth tax)…. 사원들을 위해 80년대에 이미 사내 보육시설을 열었고, 캘리포니아 벤추라의 파도가 좋은 날이면 사무실이 텅 비어도 좋으니 서핑하러 가라고 등 떠미는 회사(쉬나르의 2005년 경영철학서 제목도 ‘직원들에게 서핑을 허락하라(Let My People Go Surfing)’이다). 톰킨스의 오랜 친구 쉬나르는 68년 피츠로이 등반대의 일원이었고, ‘파타고니아’를 창업하면서 피츠로이의 정상 능선을 브랜드 로고로 채용하기도 했다. 크리스는 암벽등반을 즐기던 15살 무렵 그들을 만났고, 대학(아이다호대)을 마치자마자 갓 창업(1973년)한 파타고니아에 합류했다.
크리스는 그러니까, 톰킨스와 70년대부터 암벽에서 서로에게 목숨을 맡기던 자일 파트너였다. 그리고 “크리스야말로 톰킨스의 숨은 동력”이라는 지인들의 말처럼(가디언, 2009.2.15), 둘은 자연에 대한 가치관을 물샐틈없이 공유했다.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사유지 야생공원인 푸말린파크(땅을 더 사들여 71만5,000에이커가 됐다), 국립공원이 된 아르헨티나의 몬테레온(Monte Leon)파크, 칠레 파타고니아의 코르코바도(Corcovado)파크, 그리고 아르헨티나 최대의 야생 습지공원 에스테로스 델 이베라(Esteros del Ibera). 둘은 저 땅을 사들이는 데만 2억7,500여만 달러(약 3,250억 원)를 썼다.
참혹한 독재 시절을 겪으며 미국 백인이라면 실눈을 뜨게 된 남미인들이다. 돈 많은 ‘그링고’가 저 넓은 땅들을 뭉텅이로 사들이는 일이 순탄했을 리 없다. 더군다나 그들이 추구한 ‘복원’은, 개발에 맞선 보호에 더해 지역 경제와 긴 농경 전통ㆍ관습의 근간을 부정하는 거였다. 한 편에서는 파타고니아의 댐 개발 세력과 추종자들이, 다른 편에선 연어 양식ㆍ가축 방목으로 생계를 이어오던 주민들이 톰킨스 부부에게 저항했다. 톰킨스로선, 댐은 말할 것도 없고, 가라앉은 사료와 항생제로 물을 죽이는 양식과 과도한 방목으로 파타고니아 초원을 황폐화하는 목장을 허용할 수 없었다. 톰킨스는 “과도한 목축으로 계곡(Cochrane)이 황폐해졌다. 파타고니아의 25~30%는 이미 사막화했다”고 단언했다.(The Atlantic, 2014.9.15) “그린피스는 겁쟁이들(wimps)”이라고, “기부금만 받아먹고 하는 일이 없다”(가디언, 위 기사)고 비판하던 그였다. 그는 여느 자본가 못지 않게 강압적으로, 또 탐욕스럽게, 다만 이윤이 아닌 자신의 꿈을, 구현해나갔다.
비난도 오해도 난무했다. 핵 폐기장을 건설하려 한다, 유대인 정착촌을 만드는 중이다(부부는 앵글로색슨 성공회 신자였다), 청정수를 퍼다 물 장사를 해서 수자원을 고갈시키고 말 거다…. 칠레 정부가 푸말린 공원 한 가운데에다 경찰서를 두고 그들을 감시하고, 사유지 경계에 군부대를 배치한 적도 있었다. 90년대 말 푸말린 공원 남북을 잇는 가톨릭계 대학 부지 8만 에이커(약 9,700만 평)를 사들이려다 무산된 적도 있었다. 그는 최고가를 제시했으나 대학 측은 스페인계 발전회사에 땅을 팔았다.(NYT, 2005.8.7) 미국과 유럽의 거부들처럼 경치 좋은 자리에 수십만 평쯤 되는 소박한(?) 땅을 사서 근사한 별장을 지었다면 받지 않았을 오해였다.
크리스는 “이곳을 예전처럼 목양장으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건, 100년 뒤 아니 10년 20년만 지나도 사람들은 여기가 공원이 아니었던 때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양을 키우기 시작한 40, 50년 그 이전에는 그 땅의 주인이 농부가 아닌 야생의 동물들이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남편과 달리 “주민 설득을 등한시한 탓에 오해와 불신을 증폭시킨 점”을 후회했고, 별도의 팀을 꾸려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관계를 개선하는 노력을 도맡았다. 지역 청소년들의 하이킹ㆍ캠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주민들의 공원 안내원 취업 프로그램을 열었고, 향후 국립공원이 되면 관광수입으로 지역경제가 더 활성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The Atlantic, 2014.9.15)
자연을 복원해서 지키는 가장 근사한 해법으로 그들이 택한 게 국립공원화였다. 1929년 미 연방이 옐로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인근 티턴(Teton) 산맥을 제외하자 록펠러가 15년 동안 은밀히 그 땅들을 사들인 이야기, 지역 정치인들과 목장 주민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국립공원으로 국가에 기증해 당시 대통령이던 루스벨트가 수락한 이야기, 여름 들꽃이 그렇게 황홀하게 핀다는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톰킨스는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개인이나 단체가 사적으로 넓은 땅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다만 자신은 임시 집사(provisional stewards)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도 해낼 수 있다. 일이십 년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게 불과 지난 해 9월이었다. 크리스는 그런 그를 늘 ‘롤로(Loloㆍ젊은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는 지난 달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현지 잡지 ‘Paula’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나의 생물학적 시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서두르라고, 죽기 전에 다 끝마쳐놓으라는 말이 들린다”고 말했다. 푸말린파크의 도로와 안내소, 식당 등 공원 시설을 갖춘 뒤 칠레 정부에 열쇠를 넘길 참이라고 했다. ‘은퇴를 생각한다’는 제목이 달린 저 인터뷰에서 그는 두 딸과 손자들에게 단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겠노라고, 노년에 쓸 작은 농장과 집만 남기고 전 재산을 칠레와 아르헨티나 환경 보존을 위해 기부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베테랑 카야커이기도 했던 그는 지난 8일 지인들과 함께 한 파타고니아 헤네랄카레라호 투어 도중 돌풍에 보트가 전복되면서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훗날 사람들이 이 땅을 걸을 것이다. 무덤보단 이게 더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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