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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시인

등록 : 2016.07.17 20:00

[이원의 시 한 송이] 수박

등록 : 2016.07.17 20:00

머리통만 하다. 수박을 놓고 자주 쓰는 비유예요. 그러고 보면 수박은 머리통만 해요. 검정과 초록의 우아한 싸움 같기도 하고 고도의 위장술 같기도 해요.

수박의 거죽 말이에요.

수박은 덩굴에 매달려서, 땅에 뒹굴면서 커져요. 땅에 바싹 붙는 것으로 따지면 채송화만 할까요. 짠물 속 해초처럼 오돌오돌 줄기에 앙증맞은 꽃을 피워요. 아득하게 멀어지기로 따지면 해바라기만 할까요. 허공 속. 해가 다 져도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예요.

수박은 이상하고 신기한 열매예요. 칼끝을 대면 반이 쩍 갈라져요. 온통 살로 되어 있어요. 우리가 먹는 것은 수박의 살이에요. 살은 붉고 달지요. 물이 많고 검은 씨가 많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키 작은 채송화와 키 큰 해바라기 사이에서 수박이 살아가는 방식일지도요.

이 시는 김춘수의 ‘무의미시’예요. 무의미시는 한 풍경 안처럼 보이지만, 행과 행이 연관이 없게 써지는 김춘수의 시론이에요. 즉 의미로 이어진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요. 시론을 가지고 쓰는 시는 예정된 패배 속에서 벌이는 싸움이에요.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담보된 싸움이지요. 언어를 가지고 쓰는 시가 어떻게 의미를 벗어나겠어요? 좋은 시론의 중요성은 패배를 확인하기 위해 과정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지요. 김춘수의 무의미시도 그러하지요.

무의미시의 방향에서 읽어보면 이질적 조합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두 번 등장하는 ‘너’만 해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거든요. 그러나 이게 왜 무의미시가 되지, 라는 의문을 품게도 하는, 이중의 정교한 설계로 써지는 작품이므로, 의미의 방향으로 읽어도 재미가 발생해요. 비약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두 행만 봐도 그래요. 물이 많은 수박은 바다를 품고 있기도 하지요. 또 수박 속 검은 씨가 품은 것은 수박의 반딧불이지요. 수박처럼, 알 듯 모를 듯, ‘무의미시의 맛’이지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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