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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없는 아우성'... 요즘 책 표지 유행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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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없는 아우성'... 요즘 책 표지 유행 예감

입력
2017.04.16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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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으로 점잖은 여운을 주던 책 표지가 글자를 가득 채운 표지로 변신하고 있다.
여백으로 점잖은 여운을 주던 책 표지가 글자를 가득 채운 표지로 변신하고 있다.

“요즘 책들이 전부 파스텔톤으로 ‘분홍 분홍’한 표지들을 쓰는데, 거기에 대한 해독제 같아서 좋아요.” 회사원 김영롱(34ㆍ여)씨의 말에 신혜원(37ㆍ여)씨는 곧바로 반론을 펼쳤다. “표지가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니 좋긴 한데, 이러면 책에 대한 궁금증이 없어지지 않나요?”

16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난 독자 의견은 엇갈렸다. 요즘 출판계에 자주 보이는 ‘텍스트 표지’ 때문이다. 함축적인 제목에다 느낌 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배치하는 게 아니라 날 것 그대로 줄줄 써놓은 글 자체를 책 표지에다 올리는 방식이다. 낱글자를 풀어 쓰는 알파벳과 달리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음절 단위로 한데 모아 쓴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알파벳에 비해 우리 글이 글자 자체로 디자인을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얘기가 많았다. 글자 자체를 유려하게 활용하는 책 디자인이 외국에 비해 드문 까닭이다. 그러나 요즘 이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추세다.

동아시아 출판사는 물리학자 이종필의 시사평론집 ‘과학자가 나라를 걱정합니다’를 내면서 표지에다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 낭독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 결정문을 빽빽하게 실었다. 하명성 동아시아 편집자는 “내부적으로 ‘너무 세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문자 위주 책 표지가 흔하지 않으니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고, 책 자체가 시사평론집이니 오히려 ‘신문 사설’ 같은 느낌을 주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요즘 파격적 편집으로 종종 화제를 모으는 알마출판사(알마)는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다룬 ‘기억하겠습니다’를 내면서 표지에다 돌아가신 할머니들 20명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안지미 알마 대표는 “위안부를 주제로 한 책은 대개 감성적인 문구나 사진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책들과 차별화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 제목 그대로 위안부 할머니들 한 분 한 분을 절대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이름 배치가 ‘묘비’ 느낌을 낼 수 있도록 했다.

페미니스트 주디스 버틀러의 대담집 ‘박탈’(자음과모음)은 표지에다 대담 주제 21가지를 아예 적어뒀다. 속지에 있을 ‘차례’를 밖에다 꺼내놓은 셈이다. 자음과모음의 임채혁 편집자는 “저자나 책 자체가 가지는 무게감이 상당하고, 일정한 방향의 정치적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텍스트를 고스란히 표지 위에 올리는 작업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안지미 대표는 “글자만으로 표지를 만들면 쉽다고들 생각하는데, 거꾸로 ‘글자 덩어리’만으로 어떤 이미지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글자 모양과 자간을 일일이 다 조정하는 등 더 어렵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북막일기’ 등을 작업한 글항아리의 채정윤 편집자도 “표지에 글자들이 빽빽하게 배치되면 아무래도 제목의 비중이 줄어들기 때문에 독자의 시선을 제목 쪽으로 끌어올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과제”라고 설명했다.

텍스트 표지의 유행은 현 시국의 특이성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출판계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글자 그 자체로만 디자인하는 건 쉽게 눈에 띄지 않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잘 택하지 않는 방법”이라며 “촛불에서 탄핵, 조기 대선으로 이어지는 급박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색다른 시도가 나오는 듯 하다”고 말했다. 표지들이 목청 높여 메시지를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지에 문장을 앞세운 책이 시국하고만 관련 있는 것도 아니다. 바다출판사(바다)는 30년간 암환자 50인을 밀착 취재한 야나기다 구니오의 책 ‘암, 50인의 용기’를 내면서 저자의 메시지를 책 전면에 배치해뒀다. 고통과 죽음을 주제로 한 책인 만큼 너무 어두운 느낌이 들지 않도록 글자는 핑크색으로 했고, ‘순수’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까지 함께 놔뒀다. 덕분에 책은 화사한 느낌이다. 박소현 바다 편집자는 “암 환자나 그 주변 분들이 책을 보셨을 때 책의 메시지를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장 아닌 배려도 표지에 글자를 불러낸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김도엽 인턴기자(경희대 정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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