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는 인류 문명사에서 최고 발명품의 하나로 꼽힌다. 빠르게 대량 인쇄된 책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지식 축적이 손쉬워지면서 인류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타임지는 금속활자를 ‘지난 1000년 세계 최고의 발명’으로 선정했고, 유네스코는 “중세적 사고에서 근대적 사고로의 변환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고려말 간행된 직지(直指)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한국의 찬란한 고인쇄 문화를 보여주는 보물이다.
‘2018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이하 직지코리아)’은 직지를 탄생시킨 충북 청주시가 직지를 주제로 여는 세계인의 문화 축제다. 축제는 오는 10월 1~21일 청주 고인쇄박물관과 청주 예술의전당 일원에서 펼쳐진다. ‘직지 숲으로의 초대’란 주제로 다채로운 전시와 공연, 학술, 체험 행사를 통해 직지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청주, 세계기록유산 성지로 뜬다
글로벌 인쇄 축제답게 이번 행사에는 전 세계 인쇄문화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바로 세계인쇄박물관협회(IAPM)를 창립하기 위해서다. 개막날인 1일 열리는 IAPM창립 총회에는 세계 50여국의 80여개 인쇄박물관, 인쇄관련 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이들은 2, 3일 학술회의를 열어 기록유산과 인쇄문화의 보존, 지식정보발전을 위한 프로젝트 등을 논의한다. 김천식 직지코리아조직위 사무총장은 “전 세계 인쇄박물관 지식정보공동체 조직인 IAPM출범식 개최로 청주는 세계적인 기록문화 도시로서 위상을 굳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개막식에서는 유네스코 직지상 시상식도 거행된다. 직지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해 2001년 제정된 이 상은 기록유산의 보전·연구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유네스코가 2년에 한 번씩 주는 상이다. 올해 수상자는 9월 초쯤 발표된다.
이번 처음 열리는 ‘직지상2.0라운드테이블’은 그 동안 직지상을 받았던 전문가들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기록문화 발전을 위해 국제적 협력을 모색하는 자리다.
18m나무 숲에서 미디어 쇼로 만나는 직지
직지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면 그곳에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직지의 정신적 가치에 주목, 이번 직지코리아는 현대인에게 위로와 치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메인 무대인 청주 예술의전당 광장에 마련하는 ‘직지숲’이 그 공간이다. 직지숲은 세계적 설치미술가인 한석현 작가가 버려진 목재를 활용해 18m높이의 거대한 나무 조형물로 조성한다. 한 작가는 폐목재에 작은 식물을 심어 생명과 환경, 순환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이 숲 가운데에는 시민들이 기증한 책 1,377권으로 꾸민 책의 정원이 들어선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마음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다. 매일 밤 직지숲에서는 레이저, 프로젝터 등을 활용한 미디어 쇼가 펼쳐진다. 미디어아티스트인 윤제호씨가 직지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해석, 디지털 세상과 결합한 미디어 퍼포먼스로 풀어냈다.
백운화상, 묘덕 700년 시공을 넘다
직지코리아 주제전시관에서는 직지의 저자인 백운화상 진영(초상)이 최초 공개된다. 백운화상은 고려말 3대 선사 중 한 명.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 충남 청양 장곡사 복장유물에서 친필이 발견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백운화상이 입었을 장삼과 가사도 당시 문헌에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복원돼 전시품으로 나타난다. 직지 간행 시주자인 묘덕이 소지했던 계첩(족자 모양의 작은 책자)도 공개된다. 묘덕계첩은 당대 최고의 고승이던 인도 지공선사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어린 묘덕에게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직지의 정신을 계승하고 직지를 세상에 알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의 스토리도 만나볼 수 있다. 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음을 최초로 알린 고 박병선 박사, 직지 관련 다큐를 제작한 남윤성·마승락PD, 직지 홍보에 앞장서고 있는 류지은(고려대)씨, 박세은(서일중)양 등이다.
세계기록유산전으로는 ‘데스멋컬렉션’ ‘어린이와 가족이야기’ ‘솜전투 필름’등이 선을 보인다. 데스멋컬렉션은 네덜란드 수집가인 장 데스멋이 20세기 초 전 세계에서 수집한 900여편의 영화필름, 포스터, 홍보물로 꾸민다. 어린이와 가족이야기는 인류 최초로 동서양 전통 동화들을 체계적으로 편집하고 기록한 그림 형제의 동화집. 솜전투 필름은 120만명의 사상자를 낸 솜 전투를 기록한 세계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작가와 주민이 함께 만드는 문화거리
직지코리아는 이번 축제를 통해 직지문화특구에 특색있는 문화거리를 조성할 참이다. 김관수 총감독은 “지역과 주민을 위해 행사 후 뭔가 남기는 것을 고민했다. 직지특구 인근 흥덕로(운리단길)에 문화거리를 만드는 것이 핵심 프로젝트”라고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전문 작가와 젊은 창업자들, 지역 주민이 모두 참여해 머리를 맞댄다. 작가 애나 한은 710m길이의 흥덕로 양편 30개 건물 외벽에 독특한 색채와 조명으로 시각적 효과를 연출하는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흥덕로에서 카페, 음식점을 운영하는 청년 창업자들은 ‘1377문화협동조합’을 꾸려 이 작업을 돕고 있다. 건물주들은 주민 간담회를 열어 이런 작업을 흔쾌히 승낙했다. 김 총감독은 “마침 흥덕로 일대가 국토부의 도시재생뉴딜사업에 선정돼 문화거리 조성이 더욱 탄력을 받게됐다”며 “700m가 넘는 거리에서 한 작가의 설치미술이 진행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귀띔했다.
청년 문화협동조합은 세계문자의 거리에서 고려시대 저잣거리를 연다. 여기서 고려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음식과 특산물을 판매하고 판소리 마당극 등 거리 공연을 벌인다.
고인쇄박물관 광장과 흥덕로에서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그라운드 아트’가 진행된다. 도로를 캔버스 삼아 직지 등 우리 문화유산 이미지를 색모래로 재현하는 프로그램이다. 흥덕로 차없는 구간에서는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사고파는 ‘아트나잇 청주’를 벌인다.
어린이들은 3D프린팅한 글자를 낱말카드와 맞추는 ‘직지조판놀이’, 마구 튀는 글공을 잠자리채로 잡는 ‘직지애드쥬’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조직위원장인 한범덕 청주시장은 “지난해 11월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청주 유치로 직지 세계화 사업이 탄력을 받았다”며 “이번 직지코리아는 수준높은 전시와 다채로운 볼거리를 즐기면서 직지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직지는 1377년(고려 우왕 3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된 책이다.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1455년)보다 78년 앞선다. 상ㆍ하권 두 권인데 현재 하권 한 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다.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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