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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입력
2017.05.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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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탄 중학교 수학여행 버스는 광주로 가는 진입로에 멈추어 섰다. 저 앞에는 여러 대의 장갑차와 탱크가 보였다. 선생님들이 군인들과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버스는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5년이 지나 대학 신입생이 되어 교정을 거닐고 있다가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가로수에 붙은 사진들에서 5년 전 눈으로 봤던 모습의 의미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사진들의 행렬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끔찍한 장면들이 끝도 없이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배낭을 짊어지고 광주를 찾아갔다. 나는 거리의 풍경들에게 고백했다. 이제껏 몰라서 미안했다고. 이 풍경에 담긴 이야기를, 앞으로 내가 살면서 올바른 것을 잃어버릴 때 그걸 다시 세우는 지렛대로 삼겠다고.

스무 살 이후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귀에 가장 많이 들렸던 말은 ‘민주’였다. 최루 가스의 잔향과 함께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낱말 중에 민주는 가장 큰 질문으로 다가왔다. 존경하는 정운영 선생의 글 속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 학부모가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 아들이 그토록 좋아서, 생을 버리고 따라가버린 그 민주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고 나서 그는 오랫동안 민주라는 단어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민주는 내게도 그런 것이었다. 그 즈음 나는 신문에서 오려낸 작은 사진 하나를 책갈피로 사용했다. 지금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어느 여학생의 분신 사진이었다.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볼을 비비고 작별인사를 한 다음날, 그녀는 몸에 불을 붙였다. 나는 문학을 읽어나가며 책갈피를 꽂을 때마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온 몸에 붙은 불을 옆에 있던 사람이 옷으로 끄고 있었다. 이 사람이 목숨과 바꾸고자 하는 민주란 무엇인가. 끝없이 질문만 이어지고 답은 보이지 않았다. 전국에서 분신이 이어졌다. 생명운동을 하던 시인은 ‘죽음의 굿판 당장 때려치우라’며 비통한 마음으로 나무랐고, 그 말이 죽은 자를 욕되게 한다고 생각한 다른 시인은 ‘이제 그를 배신이라 부르자’고 맞섰다. 그 기사들도 스크랩해서 책갈피로 썼다. 민주는 날이 갈수록 내게 질문만 던졌다.

대학은 민주를 경험하고 실천해 볼 좋은 장소였다. 이 모습과 질감을 잘 지켜내면서 실천 해야겠다고 다짐 하면서 사회로 진출했다. 온실에서 싹이 나온 나의 민주는 거친 광야에서 폭풍우를 만났다. 가장 무서운 재앙은 외부의 환경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변심한 애인처럼 나는 민주를 잊어갔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잃지 말자는 다짐도 잃어갔다.

그런데 지난 3년 간, 나는 다시 민주를 앓기 시작했다. 국민이 주인이길 거부하는 어떤 힘들이, 떠오르는 배와 떠오르는 진실을 짓누르고 있던 시간이었다. 엊그제 인근 지역의 공연을 마치고 목포로 갔다. 온 목포 거리가 리본으로 이어져 있다. 목포시와 시민의 마음이 눈물 나도록 고맙다. 목포 신항의 철조망에는 아프게 떠난 이들과 아직 떠나 보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엉켜 노란 리본으로 흩날리고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 사람도 있고, 리본을 매만지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철조망 저편에 누워있는 세월호를 비석처럼 서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오래 잊고 지냈던 노래 한 소절 떠오른다.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철조망을 잡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나를 보니, 젊은 날에 품었던 민주에 대한 질문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자. 다시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하자. 떠난 이들의 품었던 꿈을 내가 살아내기 시작하자. 정의와 사랑의 꿈은 헛되지 않고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걸 지금 우리나라에서 눈으로 보고 있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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