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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침묵의 역설

입력
2017.01.1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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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이나 속담도 시절을 타나 보다. 이를테면 “침묵은 금이다”라든지, 공자님이 말씀하셨다는 “40엔 불혹”이란 말만 봐도 그렇다. 우선 “40에 불혹”이란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 내가 유난히 철이 없어 그랬던가? 40살에 나는 온갖 유혹에 흔들거렸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40에 미혼은 보통이고, 새로 인생을 짜기에 늦지 않은 나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침묵은 금이다”라는 진리의 말씀이 오도되면서 오늘날 우리 나라가 요동을 치게 된 근본원인이다. 침묵하고 있으면 위엄을 가져다 준다. 지절지절 말 많은 사람보다는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으면, 왠지 지절대던 사람은 요즘 애들 말대로 ‘쫄게’ 된다. 거기다가 국가 최고 통치자쯤 되는 분이 해야 할 말을 단문으로 던져 놓고 나서 침묵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던져진 그 한마디 말씀 뒤에 뭔가 함축돼 있음직한, 묵직한 메시지가 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해 왔다.

나 자신 늙어 가면서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 중에는 늙어서 말하기를 지나치게 밝히는 거, 그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듣는 이를 피곤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찍이 이 점을 간파한 나도 조심하느라 하고 있다. 조심하기의 첩경은 80년 세월에 켜켜이 쌓이고 쌓인 나의 두꺼운 과거 얘기를 금기로 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조심할 필요가 어느 정도 줄어든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조심하기 이전에 내 자식들이 내 입을 단속하고 나선다. 노인이 할 말을 다 하다가는 봉변을 당하는 세상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전철좌석에서 아이가 신을 신은 채, 떼를 쓰고 있는 아이를 타일러 줬다가 젊은 엄마로부터 고약한 눈총을 받은 적도 있긴 하다. 그 후로 나는 자식들이 일러 준 대로 해야 할 말을 삼켜 버린다. 우리 집 사정이나 우리 사회나 온통 비슷하게 돌아 가다 보니, 우리 사회는 소위 원로들이 마땅히 해 주어야 할 말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런 맹목적 침묵의 확장은 엉뚱하게도 마땅히 까발려야 할 불의마저 침묵으로 묵과하게 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회의 적페가 쌓이고 쌓여 갔는가 보다. 입을 열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기보다는 나 홀로 내 입 단속이나 하면서 내 몸보신이나 하는 무기력한 관리들의 모습이 즐비하다. 어찌 관리들뿐이랴. 사회 곳곳 여기 저기에 쌓인 페단을 바라 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입 단속을 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 사회를 요동치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일찍, 조금만 관계자들이 비겁한 침묵에서 벗어 났더라면, 나라가 이 지경에 까지 밀려 오지는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침묵은 일어날 사달을 미리 막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때로 사람들을 오도하기도 한다. 위엄 있게 침묵하는 뒤에는 말하지 않은 무언가 메시지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침묵을 지키고 사람들과의 대면을 피해 온 지도자가 뜻밖에도 말 할 “거리”가 없고, 말 할 깜냥이 못되어서 부득이 침묵하고, 그러자니 사람들과의 대면이나 토론을 피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말했듯이 침묵은 몰지성의 도피처였다.

이 말 많은 세상에서 말을 안하는 그 기술이 훌륭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해야 할 때 깜냥이 못돼서 부득이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는 지도자를 뽑은 백성들, 말 해야 할 때와 말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그 백성에 그 지도자였다는 자괴감을 주체하기가 어렵다.

자유롭게 말을 주고 받다 보면, 창의적인 게 나오기도 하고 의외로 건강한 사회로의 길이 뚫리기도 한단다. 덮어 놓고 침묵만이 금은 아닌 것이다.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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