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어린 사죄로도 부족한 것인가. 지난 3일 케이블채널 온스타일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채널 AOA’에서 걸그룹 AOA의 멤버 설현(21)과 지민이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여전하다. 두 사람은 지난 1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의 각자 계정에 “무지를 깊이 반성한다”며 사과문을 올렸고, 지난 16일 새 미니앨범 발매 기념 행사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죄송하다”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무식 인증” “나라 망신” 등 험한 조롱과 인신공격성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역사 관련 퀴즈를 풀다 빚어진 실수인데 과연 아이돌 그룹 멤버가 그토록 강력한 비난 폭탄을 받아야 하는 지 의문이다. ‘역사 인식의 부재’를 거론하며 인신공격을 멈추지 않는 일부 대중의 폭력성도 위험천만해 보인다. 설현과 지민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아이돌 그룹에 대한 한국사회의 소비 방식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일보 엔터테인먼트팀 기자들이 설현과 지민을 둘러싼 논란에 입체적 접근을 시도했다.
라제기 기자(라)= “역사 지식의 부족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지민의 ‘긴또깡’(김두한의 일본식 발음) 언급과 가벼운 태도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과하다는 게 문제다. 이미 공식적인 사과가 두 차례나 있었는데도 비난의 수준이 도를 넘었다.”
양승준 기자(양)= “두 사람이 공인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비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라도 역사 속 위인들 사진 늘어놓고 이름 맞히라고 하면 반도 맞힐 자신 없다.”
라= “인기 많은 연예인을 공인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공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게 옳은지 의문이다. 설현은 ‘한국 방문의 해’ 홍보대사와 선거관리위원회 홍보대사까지 맡아 더 욕을 먹고 있다. 공공기관은 별다른 연관성도 없는 연예인에게 인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홍보대사를 덜컥 맡기고 대중은 거기에 걸 맞게 의식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물론 자신들의 소양을 감안하지 않고 인기 유지를 위해 공공기관 홍보대사를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아이돌 멤버와 기획사도 비판 받아야 한다.”
양= “한국 홍보대사는 우리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면 애초 설현의 역사적 지식이나 소양을 살펴보지 않은 문화체육관광부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은 없는 것인가. 그가 홍보대사이기 때문에 더 비판 받는 건 지나치다.”
조아름 기자(조)= “만약 이들이 나치 문양과 관련된 의상을 입고 나왔다고 치자. 나치를 상징하는 의상인 줄 알았건 몰랐건 지금보다 더 강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단순히 지식 부족으로 봐야 한다. 두 사람이 사과문에 썼듯이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일이지 대중의 무차별 공격을 받을 만 한 일은 아니다.”
라= “제작진에게 책임이 크다. 편집이 가능했던 장면이다. 국내 한 개그맨이 일본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 일본어로 말 실수를 해 국내에서 곤욕을 치른 게 벌써 10 여 년 전 일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유사한 논란이 반복됐는데 생방송도 아닌 상황에서 출연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긴또깡’은 국민의 원초적인 반일정서를 건드렸다. 제작진이 보편적 인식을 고려했다면 당연히 편집했어야 한다.”
양= “얼마 전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멤버 쯔위 역시 방송에 나와 제작진이 준비한 대만 국기를 흔들어 홍역을 치렀다. 방송인 은지원은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담배 피는 장면이 나와 비난 받았다. 성인이 담배를 피우는 게 무슨 문제인가. 결국 논란의 소지가 있을 장면을 걸러주지 못한 제작진이 문제를 키웠다.”
조= “만약 설현과 지민이 제작진이 낸 문제를 망설임 없이 다 맞혔더라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편집했을 수도 있다. 제작진이 역사인물 맞히기 퀴즈를 만든 것 자체가 ‘아이돌 그룹은 지식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에서 출발한 듯해 불쾌하기도 하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제작진의 인식이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라=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만큼 대중 앞에서 발언이나 태도 하나하나에 조심성을 가져야 하는 건 맞다. 그렇다고 쇼케이스에 나와 눈물 어린 공개사과까지 해야 할 정도인가 의문이다. 아이돌그룹에게 역사나 교양 교육을 특별히 시키는 것도 아닌데 대중은 지나치게 높은 인성과 지성을 바란다.”
조= “눈물을 보인 걸 두고 ‘뭐 잘한 게 있다고 우느냐’란 소리까지 나온다. 인기가 치솟으면 무조건적으로 추켜세우다 실수하면 바로 깎아 내리는 모습에서 한국사회가 아이돌그룹을 소비하는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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