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나의 이력서] 이주일(18)퇴출 위기와 미국 공연

알림

[나의 이력서] 이주일(18)퇴출 위기와 미국 공연

입력
2002.04.10 00:00
0 0

1982년 6월 미국 LA에서 NBC TV ‘투나잇 쇼’의 명사회자 자니 카슨을 만난 적이 있다.한국일보 미주지사 초청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에 가 순회공연을 하던 때였다.

‘투나잇 쇼’는 당시 주한미군 방송인 AFKN(지금의 AFN)을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토크 쇼였다.

내 매니저를 자처했던 최봉호(崔奉鎬)씨의 후배 프로모터가 “한국계 코미디언 자니 윤과 견줄 만한 거물”이라며 자니 카슨을 꼬셨던 것이다.

자니 카슨은 나를 보자마자 “외모에서 천부적인 자질이 느껴진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리고는 불쑥 “내가 한국에 가면 당신과 비교해서 누가 더 인기가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내가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식층은 당연히 나를 좋아할 것이고, 당신은 서민층에게 환대를 받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순발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즉석에서 ‘투나잇 쇼’ 출연까지 제의했다.

짧은 영어실력 탓에 결국 무산됐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제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내가 최씨와 1억원의 출연계약(서울구락부)을 맺은 사실에 큰 흥미를 느껴 출연 제의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 공연에서 자니 카슨까지 만난 나였지만 당시 나는 큰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해 전인 1981년 말부터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 기대는 점점 높아지는데 밑천은 다 떨어져가고….

시청자가 외면하면 나는 그 순간 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스크립터 4명이 나를 잘 받쳐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재충천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TV 출연 중단이었다.

1981년 12월 나는 “6개월 동안 모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KBS ‘코미디 출동’과 MBC ‘웃으면 복이 와요’ 등 4~5개 프로그램에 일체 출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청자들이 내 이름은 기억해줘야 하겠기에 MBC ‘이주일의 세월 따라 노래 따라’와 ‘임국희의 여성살롱’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은 계속 출연했다.

인기 관리를 위해 나름대로 영리한 작전을 세웠던 셈이다.

그 다음 선택한 것이 바로 음반 발표와 미국 공연이었다. 물론 TV에 얼굴은 이제 그만 비치자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1982년 5월 ‘우주시대’ ‘서울 참새 시골 참새’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등 8곡이 수록된 내 첫 앨범은 이렇게 탄생했다.

내가 작사하고 함중아(咸重亞)씨가 작곡한 동요 풍의 이 노래는 그래도 꽤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생애 첫 미국 공연.

1982년 6월 9일 가수 조용필 혜은이 등과 함께 미국 순회공연 길을 떠나 7월 중순에 돌아왔다.

이유야 나름대로 퇴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떠난 것이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LA, 뉴욕, 덴버, 라스베이거스 등 공연이 열린 도시마다 엄청난 수의 동포들이 몰려들었다.

교민사회가 탄생한 이래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은 처음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요즘 어린 스타들을 보면 가끔씩 미국에 갔다가 2~3개월 만에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한창 뜨다가도 팬들이 조금 식상해 한다 싶으면 인기 관리를 위해 훌쩍 외국을 갔다 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그들보다 최소 20년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