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농촌주택개량 지원받으려
500평 넘는 땅에 30평 집 건축
중정 조성해 좁은 실내 극복
부부ㆍ老母방 분리로 독립성 확보
다용도실ㆍ창고는 농촌 활동 무대
실용성ㆍ디자인 잡은 ‘적정 주택’
도시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 귀촌하는 순간 맞닥뜨리는 자연의 실체는 연애와 결혼의 괴리만큼 무시무시하다. 사계절 쉬지 않는 자연의 왕성한 생육은 고대인들이 왜 종교에 의탁했는가를 새삼 실감하게 하고, 벌레, 흙, 잡초, 추위와의 전쟁에서 무력한 도시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필패(必敗)다. 성공적인 귀촌을 위해서는 사람뿐 아니라 집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충남 청양군에 지은 한 농가주택은 자연과 동거에 대비하는 집의 모범자세를 보여준다.
2년 전 대전에서 살던 40대 부부가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에 집을 짓기 위해 윤주연 건축가(OfAAㆍ적정건축)를 찾았다. 80대 노모가 살던 100년 넘은 흙집을 헐고 새집을 지어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조건은 딱 하나. 보건복지부의 농촌주택개량자금지원 대상이 될 수 있도록 30평 이내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노후한 시골집을 개량하기 위해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이 사업은 증ㆍ개축, 신축 농촌주택에 최대 2억원까지 저렴한 금리로 공사비를 빌려준다.
30평을 100평처럼…바깥을 끌어 안다
네덜란드 건축회사 OMA와 UN스튜디오에 있었던 윤 소장은 소위 하이엔드 건축이 아닌, 삶에 밀착된 건축을 하고자 지난해 국내에 사무소를 낸 젊은 건축가다. 평범한 시골집은 그가 당장 도전해보고 싶은 과제였을 것이다.
집은 30평이어야 하지만 대지는 500평이 넘는 특이한 경우였다. 건축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세대가 크지 않은 집에서 불편함 없이 어우러져 사는 것과 농촌 생활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는 것,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공간을 짜야 했다. 윤 소장은 일단 어머니 방과 부부 방을 집 양 끝에 놓고 가운데 거실과 주방을 배치해 분리했다.
“어머니께서는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사셨기 때문에 친구도 많고 성격이 외향적이라 외출이 잦으세요. 반면에 부부는 밖에서 일하는 시간 외엔 집에서 쉬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현관이 있는 쪽에 어머니 방을 두고 그 옆에 손님방을 작게 만들었어요. 부부 방은 집 가장 깊숙한 곳에 배치하고 방 안에 화장실과 드레스룸을 따로 만들어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부부의 방 위엔 작은 다락방도 만들었다. 침대와 책꽂이만 있는 방을 벗어나 영화, 독서 등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다.
거실과 주방은 도심형 아파트와 다를 바 없이 모던하지만 중정과 이어지면서 색다른 분위기를 낸다. 건축가는 좁은 실내를 어떻게 하면 넉넉히 쓸까 고민하다가 주방 식탁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쏙 들어갈 작은 중정을 만들었다. 유리로 된 폴딩 도어로 연결해 다 열면 한옥 대청마루처럼 실내가 외부로 확장되는 효과가 난다. 식탁을 하나 더 붙이면 야외 식당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중정은 건축면적에 포함이 안 되니까 면적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집을 넓게 쓸 수 있죠. 양쪽 방을 더 많이 떨어뜨리는 효과도 볼 수 있고요.”
건축가는 중정에 상록수를 심으려는 건축주를 뜯어말려 산딸나무를 심었다. 크기가 아담하고 벌레가 꼬이지 않으면서 사계절 다른 풍광을 선사하는 나무다. 데크 위에 심은 산딸나무는 초록이 지천인 환경에서 묘하게 분리돼 그림처럼 시선을 집중시킨다.
데치고 말리고 끓이는 시골살림
주방이 모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넓은 다용도실과 별채로 지은 창고 덕분이다. 윤 소장에 따르면 시골 살림은 짐과의 싸움이다. “두 세대가 만나니 살림이 굉장했어요. 냉장고만 4대였으니까요. 시골 살림의 규모는 원래 도시와 비교가 안 돼요. 특히 텃밭이 넓을 경우엔 계절별 수확물을 처리할 공간이 꼭 필요합니다. 절이고, 씻고, 끓이고, 삶고, 데치고, 장 담그고…. 행위도 많을뿐더러 조리기구와 그릇의 가지 수도 엄청나요. 이걸 수용할 공간이 없을 때 욕조에서 김치 담그고 방에 메주를 매다는 참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다용도실엔 나머지 냉장고 3대와 보일러, 세탁기, 그리고 삶고 끓이고 데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조리기구가 다 들어갔다. 건축가는 부엌에서 다용도실로 이어지는 주방 시스템을 바깥의 수도와 장독대, 텃밭까지 하나로 연결시키는 동선을 짰다. 밭에서 따온 채소들을 수도에서 씻어 전처리를 한 뒤 다용도실로 옮기거나 장독대에 저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작업은 창고 겸 주차장에서 이뤄진다. 평생 텃밭을 일궈온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일명 농사의 달인으로, 손길 닿는 곳마다 배추, 양파, 고추, 마늘이 앞다투어 자라난다. 수확한 농작물을 가지고 매년 가을 동네 사람들과 수백 포기 김장 담그는 것이 연례 행사다. 윤 소장은 창고에 수도와 가스를 놓아 김장 같은 품앗이 행사가 있을 때 주무대로 쓸 수 있게 했다. 큼직한 고무 ‘다라이’를 가운데 놓고 사람들이 김장을 담그는 동안 집 안 부엌에선 수육을 삶고, 본채와 창고 사이 작은 공간에선 마을 잔치가 벌어진다.
“창고의 보조주방과 본채 주방이 마주보도록 작은 창을 하나씩 냈어요. 설계하면서 가장 큰 과제가 집의 17배나 되는 땅이 최대한 버려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는데, 보조주방을 만들면서 실내 주방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외부로 끌어낸 거죠. 주방의 창을 통해 양쪽에서 음식 그릇을 건네는 풍경을 상상했습니다.” 보조주방은 평소엔 오래 무르도록 끓여야 하는 음식이나 냄새가 심한 음식을 요리하는 장소로도 활용된다. 가마솥 부엌의 현대적 변용이다.
필요한 호사 누릴 ‘적정 디자인’
집 뒤쪽이 시끌벅적한 작업 공간이라면 앞쪽은 전원생활의 로망을 실현시킨 깔끔한 정원으로 완성됐다. 너른 잔디밭에 석축을 쌓고 건축주가 오랫동안 벼르던 소나무도 세 그루 심었다. 기능에만 주안점을 둔 것 같지만 집 곳곳에는 조형에 대한 욕심이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다. 건축가는 흔한 박공지붕(책을 거꾸로 엎어 놓은 모양의 삼각지붕) 대신 깊은 처마를 가진 평지붕을 이용해 두 덩어리로 나뉜 집을 하나로 단정하게 연결했다. 창고와 다락의 지붕도 사선으로 통일감 있게 디자인했다.
따로 이름을 짓지 않았지만 윤 소장은 이 집을 ‘적정주택 1호’라고 부른다. “‘적정기술’은 있는데 ‘적정디자인’이란 게 없어요. 거창하거나 복잡한 디자인이 아닌 삶에 꼭 필요한 만큼의 디자인을 저는 적정 디자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집장사의 집에 몸을 끼워 맞추거나 건축가의 집을 떠받들고 사는 것”으로 양분된 국내 주택시장을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이 집을 시작으로 30평 크기의 주택을 100채 짓는 게 목표예요. 이유 없는 사치가 아닌 꼭 필요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집을 짓고 싶습니다.”
청양=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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