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달 24일 첫 방송된 KBS2 수목극 ‘태양의 후예’의 선전이 놀랐다. ‘100% 사전 제작 지상파 드라마는 망한다’는 속설을 뒤집으며 초봄 방송가 최고 화제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청률만 봐도 한 눈에 띈다. 첫 회 14.3%(닐슨코리아 집계)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더니 2회에서는 15.5%로 올랐고, 3회는 무려 23.4%를 기록했다. KBS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지상파 방송 평일 미니시리즈 첫 방송 시청률 중 ‘태양의 후예’가 가장 높았다. 지상파 방송사에 재난이나 마찬가지였던 예전 사전제작 드라마의 성적과 비교해도 ‘태양의 후예’의 초반 성과는 눈부시다. 130억원을 들인 대작 MBC ‘로드 넘버원’(2010)의 평균시청률은 6.2%였고, SBS ‘파라다이스 목장’(2011)은 8.9%였다. 대형 흥행 영화 ‘친구’를 원작으로 삼고 곽경택 감독이 연출까지 한 MBC ‘친구, 우리들의 전설’(2009)도 6.7%를 기록했다. 사전제작 드라마에게 시청률 10%는 넘지 못한 벽이었다.
‘태양의 후예’가 초반 성과를 내자 광고주도 반응을 보일 조짐이다. 벌써부터 광고 ‘완판’ (완전판매)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KBS는 몇 년 전만 해도 한 자릿수 시청률과 저조한 광고 판매 실적 때문에 미니시리즈 폐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태양의 후예’가 사전제작 드라마뿐 아니라 죽어가던 미니시리즈에 ‘심폐소생술’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케이블채널 tvN의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시그널’, ‘미생’ 등에 밀렸던 지상파로서는 ‘태양의 후예’로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태양의 후예’는 “지상파 드라마는 안 본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고 있다.
‘로코의 귀재’ 김은숙의 이유 있는 변신
‘태양의 후예’는 김은숙 김원석 작가 공동집필로 밑그림이 그려진다. 김은숙 작가는 ‘파리의 연인’과 ‘연인’ ‘시크릿 가든’ 등으로 열성 팬들을 거느린 로맨틱코미디(로코)의 귀재다. 인지도 높은 작가인데도 “이번엔 로코가 아닌 멜로”라며 공동 작업을 자처했다. 김원석 작가는 영화 ‘짝패’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조감독 출신으로 ‘친구, 우리들의 전설’의 극본을 맡아 사전제작 드라마를 경험하기도 했다.
김은숙 작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로코의 기본 공식을 쏙 뺐다. 김은숙 작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까칠한 재벌 2세 남주인공과 신데렐라형 여주인공의 만남은 아예 없다. 재난 지역에 파병된 특전사 대위 유시진(송중기)과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의료봉사단에 투입된 강모연(송혜교)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변화를 모색했다. 전쟁과 의학, 사랑이라는 강한 장르적 양념이 버무려졌다.
당연히 스케일도 커졌다. ‘태양의 후예’는 13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드라마다. 백마 탄 왕자를 향해 가는 신데렐라 주인공의 단순한 사랑이야기 대신 생사를 놓고 펼쳐지는 운명적 사랑의 대서사가 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색깔을 버린 김은숙 작가의 새로운 도전은 끊임없이 자기 복제를 일삼는 막장드라마 작가들과는 비교되는 행보이기도 하다.
막대한 돈과 스타 작가 투입만이 ‘태양의 후예’의 성공 요인이 아니다. ‘로드 넘버원’도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군인 이장우(소지섭)과 그의 연인인 의사 김수연(김하늘)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펼쳐졌다. 외피만 보면 ‘태양의 후예’와 닮은 꼴이다. 하지만 ‘로드 넘버원’은 실망스러운 시청률로 종방했고, ‘태양의 후예’는 시청률을 매회 높이고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두 드라마의 차이는 바로 김은숙 작가”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사전 제작 대작 드라마들은 전쟁 장면 등 단순한 볼거리 보여주기에 치중했지만 ‘태양의 후예’ 속 스펙터클은 진한 멜로의 배경이 된다”고 주장했다.
첫 회 등장했던 헬리콥터 장면이 대표적이다. 강모연과 데이트 약속을 한 유시진이 부대의 갑작스런 부름에 따라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애틋한 감정을 나눈다. 유시진이 “다음주 주말에 영화 보러 가자”고 말하자 강모연은 “네, 좋아요”라고 답한다. 헬리콥터로 떠나는 유시진, 그를 바라보는 강모연의 모습만으로도 낭만의 농도는 짙어진다.
송혜교 김지원, ‘리모콘 여심’ 사로잡다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캐릭터는 로코와 멜로 장르의 핵심. ‘태양의 후예’의 강모연은 김은숙 작가 작품 속 길라임(‘시크릿 가든’)이나 강태영(‘파리의 연인’)처럼 남자들에게 사랑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
간신히 영화 데이트를 즐기게 된 유시진이 부대의 호출로 또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강모연은 속마음을 바로 드러낸다. ‘나 또 바람 맞는 거냐?…. 난 그냥 (혼자 영화)보고 가겠다. 가보라”고 쿨하게 말한다. 자신이 군인이라 자유로울 수 없는 신분임을 강조하는 시진에게 던지는 말도 당차다. 그는 “난 의사다. 생명은 존엄하고 그 이상을 넘어선 가치나 이념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내가 기대한 만남은 아닌 것 같다. 즐거웠다”고 말하며 돌아선다. 여성 시청자들일수록 환호할만한 대사다. 경기 의정부에 거주하는 30대 주부 박정아씨는 “송혜교의 뚜렷하고 분명한 의사 표현이 까칠하다기 보다는 시원했다”며 “무뚝뚝해 보이지만 내면이 단단한 강모연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윤명주(김지원)도 여성 시청자를 사로잡는 캐릭터다. 계급차이로 사랑을 저버리려는 서대명(진구)을 향해 “가기만 해. 거기서 서대명 상사. 귀관은 상급자한테 경례도 안 하고 가나?”고 외친다. “그대로 서있어. 밤새 서있어 죽을 때까지 서있어!”라고 앙칼지게 사랑을 표현할 때는 사이다가 따로 없다.
강모연과 윤명주는 일은 똑 부러지게 하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서툴고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는 여주인공들의 진부한 모습을 뛰어넘는다. 남자들에게 명확한 직업의식과 사고방식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요즘 여성상을 대변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경남씨는 “멜로에서는 여자캐릭터가 특히 중요”하다며 “여성들이 주로 시청하는 멜로의 특성상 여주인공이 공감을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모연과 윤명주도 ‘태양의 후예’ 시청률 고공비행의 주요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사전제작 드라마의 장점인 촘촘한 인물 묘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태양의 후예’의 제작과 방송 방식도 눈길을 끈다. ‘태양의 후예’는 중국 화책미디어그룹으로부터 530억원 규모의 투자를 받은 영화투자배급사NEW가 제작을 주도했다. 중국의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아이치이를 통해 한중 동시 방영되고 있다. 지상파 방송과 스트리밍 등 중국의 다양한 채널로 시장이 넓어지면서 제작 규모가 커지게 됐다. 지난달 25일 ‘태양의 후예’는 중국 조회수 3,000만건을 돌파해 흥행이 예상되고 있다. ‘태양의 후예’의 배경수 책임프로듀서(CP)는 “제작비 부족에 시달리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작가는 극본을 수 차례 수정하고, 연출진은 최근 중요도가 높아진 후반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됐다”며 “전반적으로 높은 완성도가 시청률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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