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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새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

입력
2017.03.1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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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동생은 다시 이불 위로 쓰러진다. 엄마가 동치미 국물을 가져와 마시라고 주신다. 찬 동치미 국물을 마시니 속이 좀 나은 것 같다. 서둘러 고양이 세수를 하고 빨간 내복 위에 바지와 스웨터를 걸치고 아직 어지럽지만 등교길에 오른다. 70년대에 흔하던 연탄가스 마신 날의 풍경이다.

연탄 난방을 하던 시절에는 연탄 가는 것이 정말 성가시고 힘든 일이었다. 연탄 아궁이에는 대부분 연탄 두 장을 아래 위로 넣는데 하루에 두세 번은 다 탄 아래쪽의 연탄을 꺼내고 새 연탄을 넣어 주어야 했다. 연탄을 갈면서 연탄가스를 마시는 것쯤이야 당연했고, 밤새 방으로 새어 들어온 연탄가스를 마시고 종일 속이 울렁거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겨울이면 연탄가스를 마시고 사망한 사람들의 뉴스가 예사로 보도되었다.

90년대 초반 공전의 히트를 쳤던 광고 한 편을 보자.

덜컹 연탄광의 문을 열고 연탄집게를 든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온다. 연탄 한 장을 들고 뽀드득 눈 쌓인 마당을 지나 한데 있는 연탄 아궁이를 열고 연탄을 꺼낸다. 아래 위가 붙은 연탄 두 장이 할머니의 집게에 잡혀서 나오고 할머니는 붙은 연탄을 요령껏 떼어낸다. 풀썩 연탄가스가 날리고 할머니는 찡그리며 손으로 가스를 쫓는다. ‘어휴’하는 신음이 저절로 나온다. 싸락눈이 싸락싸락 날리고 바둑이는 괜히 겅중거리는데 할머니는 하얗게 재로 변한 연탄을 대문 밖으로 내다 쌓는다. 현관 앞에서 어깨의 눈을 터는데 “벌써 다 갈았어?”하며 할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춘데 왜 나오우? 어여 들어가요.” 더 추웠을 할머니가 덜 추운 할아버지를 위한다. 그리고 며느리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들린다.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

1991년에 방송된 경동보일러의 TVCM이다. 90년대까지도 시골엔 보일러 없는 집이 대다수였다. 찬 개울에 명태를 씻어 눈바람 부는 덕장에 말리는 노부모님, 소 먹이는 아버지와 얼음을 깨고 물을 뜨는 어머니, 당신도 덜덜 떨면서 “이 추운데 애들 고생이나 안하는지 원…”하고 걱정하는 보일러 광고 속 시골 부모님의 모습이 한동안 도시에 사는 자식들의 마음을 울렸다.

오리털 파카는 구경하기도 힘들고 히트텍 보온내의는 들어본 적도 없던 옛날. 아랫목은 절절 끓어 장판이 누렇게 익어도 윗목의 자리끼엔 살얼음이 얼고,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두꺼운 솜이불을 덮어도 이불 밖에선 허연 입김이 보이던 웃풍 센 방들. 보일러도 없이 연탄 한두 장에 의지해 견뎌온 길고 추운 겨울들. 그 모두가 이제 아득하게 느껴지는 21세기가 되었다. 시골의 ‘아버님 댁에 놓아’ 드리고 싶던 보일러도 놀랄 만큼 발전해서 전화로 밖에서 끄고 켜는 단계를 거쳐, 알아서 가스비를 아껴주고 지진이 나면 저절로 멈추는 경지까지 진화했다. 새 보일러로 교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게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평범한 서민들도 보일러 때문에 속 썩을 일은 거의 없는 편리한 시대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 직후에도 청와대에 머무는 이유가 삼성동 집 보일러 고장 때문이고 수리에 며칠은 걸린다는 보도가 나왔다. “3, 4년 전 대통령 사저의 보일러를 한 번 수리한 적이 있는데 그 후로는 손본 적이 없다”는 주변 보일러 업체의 증언도 있었다. 세계로 수출하는 우리나라 보일러의 수준을 생각하면, 3년 전 손본 보일러가 다시 고장 나고 수리에 시간이 많이 든다는 말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삼성동으로 가신 후에도 방문하고 나온 의원은 ‘거실이 너무 춥다’고 했다. 어쩌면 그 분은 보일러 온도 올리는 법을 모를 수도 있겠다. 대한민국 보일러 업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어느 회사든 앞장서 음성인식 되는 최신 보일러를 놓아 드리면 좋겠다. “삼성동 댁에 새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

(경동보일러 연탄갈기 편/1991년 TVCM 스토리보드)

(경동보일러 연탄갈기 편/1991년 TVCM 유튜브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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