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록 : 2017.03.02 18:17
수정 : 2017.03.02 18:17

[배철현의 승화] 수용능력(收容能力)

등록 : 2017.03.02 18:17
수정 : 2017.03.02 18:17

인간이란 동물은 의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조절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을 때 차려야 하는 격식, 식탁에서 지켜야 할 예의, 공중시설을 이용할 때 가져야 할 몸가짐 같은 것들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번역한 고대 그리스어 표현인 ‘폴리티콘 쪼온(politikon zoon)’을 직역하자면 ‘도시 안에서 살면서 다른 시민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동물’이란 의미다. 인류문명과 문화의 토대는 내가 내 이웃과의 조화로운 관계인 예절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예절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구성원을 ‘시민’이라고 부른다. 시민을 시민답게 만드는 가치는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다. 책임은 ‘나’라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우리’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이타심, 공동체 의식, 그리고 배려에 닿아 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동물이 아닌 도시라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신다윈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윈주의가 주장하는 ‘진화’라는 용어는 과학적인 용어다. 이 생물학적 개념은 엄격하게 결정론적이며 환원적으로 흑과 백이 명확히 구분된다. 옳고 그름만 존재할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최근 과학계에선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신다윈주의가 등장하였다. 진화의 주체는 ‘이기적 유전자’이며 유전자를 담고 있고 있는 유기체인 인간은 유전자가 가차 없이 번식하는 숙주일 뿐이다. 영국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이 점을 설교한다. 그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생존 기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화된 로봇 도구입니다. 이 유전자의 이기심이 인간 개인행동의 이기심을 일반적으로 초래합니다.” 신다윈주의 시대의 복음은 ‘이기심’이다.

도킨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가 진화한다고 믿는다. 대표적으로 미국 생물학자 마크 커슈너와 존 게하트는 ‘생명의 개연성’이란 책에서 유기체가 진화의 변이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기체가 진화과정에서 생물의 유전적인 형태와 생리적 성질인 표현형(表現型) 생산에 참여한다.” 인간문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상징이나 행동은 유전자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의식과 의지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다.

유기체는 자신의 진화를 위한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든다. 이런 의도적 환경조성을 ‘니취 컨스트럭션’(niche construction), 굳이 번역하자면 ‘틈새환경 조성’이라고 부른다. ‘틈새환경 조성’이란 개념은 유기체가 자신이 거주하는 환경을 변형시킨다는 의미다. 유기체가 환경에 영향을 주면, 그 변화는 다시 어떤 형질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에 개입한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면, ‘틈새환경 조성’은 목적 지향적이다. 유기체는 스스로 배우고 그 배움으로 자신이 거주할 환경을 변화시킨다.

몇몇 진화생물학자들의 과학적 설명이나 인문학자들의 설명으로는 정교하고 복잡한 인간문화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는 수십억 년 동안 진행된 우주의 생성과 생물의 진화과정을 ‘경외’로 표현하였다. 자신의 능력으론 설명할 수 없고 그저 그 앞에서 존경심을 표현할 뿐이다. 도킨스는 이 진화과정을 무의미로 설명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우리가 예상한 그런 특징들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만일 그 기저에 특징이 있다면, 디자인도, 의도도, 선도, 악도 없고 단순히 맹목적이며 매정한 무관심일 뿐이다.” 도킨스의 주장은 일종의 종교적 신념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이 누구인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인류에게 일어난 사실에 관한 호기심과 그것을 알려는 다양하고 겸손한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동식물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 틀에 주목한다. 그는 그 틀이 ‘수용능력’이며, 항상 새롭게 생기고 확장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에 생물이 생존 가능하게 한 수용능력들이 있다. 지구에 광합성작용으로 산소가 만들어진 수용능력, 단세포 생명체에서 수십억 년을 거쳐 정교하고 복잡한 유기체로 변한 수용능력, 조류와 포유류가 체내에서 발생하는 대사열로 외부의 기온과는 별도로 스스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려는 내온성이라는 수용능력, 포유류들은 태어난 후 자신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자신의 부모 보살핌에 의존하는 수용능력, 사족보행을 하다 두족보행을 통해 생존을 강화하는 수용능력, 도구를 만들어 사냥을 손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수용능력, 불을 발견하여 사냥한 음식을 구어 먹어 뇌를 크게 만들어 생각할 수 있는 유인원이 된 수용능력 등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원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노력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우리사회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창조적인 틀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수용능력’은 무엇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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