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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영욕의 20년 정치인생 파국…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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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영욕의 20년 정치인생 파국…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입력
2017.03.3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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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정계 복귀해 선거여왕 등극

첫 여성ㆍ부녀대통령에서 국정농단으로 추락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재훈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재훈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재훈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재훈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31일 구속 피의자로 구치소에 수감되면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20년 정치인생도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 정치사상 첫 여성 대통령, 첫 부녀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우며 화려한 정치행보를 보였지만 임기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로 헌정사상 첫 파면 대통령, 법원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첫 전직 대통령이란 오명을 안았고, 전두환ㆍ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으로 추락해 파국을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1952년 대구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1남2녀의 첫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영애’라는 호칭으로 청와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 딸이라는 자리는 일찌감치 그를 정치에 뛰어들게 했다. 1974년 8ㆍ15 경축행사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숨지면서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22살 때부터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며 권력의 핵심부를 경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동행하고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정치 수업을 받았다.

5년 뒤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김재규에게 저격 당해 숨지자 박 전 대통령은 동생 근령ㆍ지만과 청와대를 떠난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남들이 평생 울 만큼 눈물을 흘렸다”는 당시 회고는 훗날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이후 18년 동안의 은둔이 시작된다. 아버지 재임시 권력을 누렸던 측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그의 가슴 속에 ‘배신 트라우마’가 각인 됐다. 이 무렵 그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 등 측근은 결국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씨앗이 됐다. 칩거시절 박 전 대통령은 대중 앞에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영남대 이사장, 육영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를 발족하는 등 일가의 정치적 명예회복을 위한 물밑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본격적인 정치 인생은 1997년 시작됐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캠프의 고문으로 복귀, 이듬해 4월 대구 달성 재ㆍ보선에서 승리하면서 여의도에 입성했다. 2004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한나라당이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을 얻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난파 위기를 맞았을 때 보수정당의 첫 여성 대표가 됐다. 2년 3개월 동안 당 대표를 지내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여당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면서 ‘선거의 여왕’으로 부상,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직전에는 서울 신촌에서 유세를 하던 중 피습을 당했다. 얼굴 오른쪽 11㎝의 긴 흉터도 그때 생겼다. 깨어난 후 직후 꺼낸 “대전은요?”라는 말 한마디가 선거 승리 요인이 됐다. ‘한마디 정치’의 시작이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패배로 와신상담한 그는 결국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누르고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돼 34년 만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일성으로 시작한 국정은 그러나 끊임없는 불통, 친박 정치 논란으로 부침을 거듭하다 집권 2년 차에 맞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리더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4년 차인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국민적 신뢰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최순실 게이트의 공동 주범으로 지목된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국민담화에서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회한을 쏟아내는 등 끊임없이 결백을 주장했지만 10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청와대를 떠나며 사과 대신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한마디를 남긴 그는 파면된 지 21일만인 31일 구속 수감되며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1997년 정계에 복귀한 지 20년, 최고 정점에서 밑바닥까지 추락한 그는 영어의 몸으로 영욕(榮辱)의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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