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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3)한국전쟁과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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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3)한국전쟁과 우리집

입력
2002.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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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월남 후 비교적 넉넉하게 살던 우리 집이 갑작스레 어려워진 것은 이 때부터다.우리도 서둘러 피란길에 올랐다.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진리에서 살던 우리는 몇몇 생필품만 챙겨 그리 멀지않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3개월 뒤 사천면이 수복되자 아버지가 먼저 진리로 들어가셨다. 나머지 식구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우리 일가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됐다.

진리에서 어업조합 일에 매달려 있던 아버지가 1ㆍ4 후퇴 때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공산당을 피해 월남했던 아버지는 이북 사람들 눈에는 지극히 불량한 자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새 더 극성스러워진 좌익들에게 붙잡혀 지독한 테러를 당했다. 어머니와 내가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의식불명 상태로 초주검이 돼 있었다.

사천면이 다시 국군에 의해 수복된 어느날. 경찰에서 빨갱이를 모두 색출해 공회당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피해자들에게 피해사실을 고발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놈들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어린 내게도 그놈들은 죽이고 싶도록 미운 존재였다.

쇠스랑처럼 생긴 생선 찍는 집게를 찾아 들고 그놈들을 죽이겠다고 설쳤다. 정말 그때 심정으로는 죽이기까지는 못하더라도 크게 상처를 입힐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가슴에도 분노가 크게 일렁였던 모양이다.

겉으로는 우리 모자에게 “‘적을 사랑하라’는 옛 어른의 말씀을 모르느냐”고 호통을 치셨지만, 가슴 속 분노를 삭이느라 자신의 입술이 찢겨져 나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후 건강 문제로 직장생활이 불가능했고 우리 집은 어머니의 생활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한마디로 여장부셨다. 특히 장사수완은 정말 놀라웠다.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수복군이 매일 바뀌었는데 국군이 밀리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마을 남정네는 일제히 바다로 피신을 갔다.

쌀과 돈을 챙겨 똑딱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국군이 돌아올 때까지 표류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셨다. 사과며 고구마를 사들여 배에다 싣고 바다로 나가 그들에게 비싼 값으로 판 것이다.

참으로 남자 못지않은 뚝심이었고 놀라운 생활력이었다. 내가 유명해지자 “나도 TV에 출연시켜달라”고 조르셨던 어머니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이야기도 조금 해야겠다.

한국전쟁 때 나는 사천면 운양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담이 크고 자신만만한 구석이 있었다.

대장 기질이 강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 위에 군림하려 했던 국민학생 시절 이야기이다.

나는 반에서 늘 1등이었는데 장설자라는 서울에서 전학 온 여학생 때문에 수모를 당했다.

전학을 오자마자 1등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나는 원통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장설자 아버지한테 ‘와이로’(촌지) 받으셨죠. 그래서 걔를 1등 시킨 거죠?”

장설자의 아버지가 그곳 수협조합장이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선생님은 한동안 붉으락푸르락 화를 이기지 못하시더니 내 얼굴에 한방을 먹이셨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피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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