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인구 대비 휴대폰 보급률은 90%에 육박하거나 이를 넘는다고 한다. 어린 연령대를 제외하면 거의 온 국민에게 휴대폰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지하듯 휴대폰은 단지 전화기가 아니다. 그것은 로봇이다. 적어도 스마트폰은 분명히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는 저마다 로봇 한 대씩을 지닌 셈이다. ‘반려로봇’의 시대가 성큼 다가섰음이다.
로봇하면 흔히 사람처럼 생긴 모양새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 사고에 불과하다. 꼭 인간의 형상을 띠고 인간처럼 움직이는 기계장치만이 로봇은 아니라는 말이다. 동력을 제공하고 동작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명령된 작업이나 조작을 자동적으로 해가는 기계 장치는 다 로봇이다. 스마트폰도 동일하다. 인간이 터치하면 그것은 뭔가를 스스로 처리하여 결과를 내놓는다. 게다가 처리 방식이 갈수록 인간 지능을 닮아가고 있다. 20세기형 기계 장치를 훌쩍 넘어선, 지능화(SMART)된 21세기형 첨단 로봇인 까닭이다.
갈수록 스마트해지는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자율주행 수준이 아니더라도 근자에 생산되는 신형 자동차는 틀림없는 로봇들이다. 사람의 조작 없이도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차간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해주고, 차선을 넘어가면 알아서 선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추돌 가능성이 높아지면 저절로 속도를 줄이는 똑똑한 로봇이다. 그러니 우리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스마트한 자동차를 탔다면, 우리는 손 안에 로봇 한 대를 쥐고서 또 다른 로봇 속에 있는 구도에 놓인다. 로봇 속의 인간, 그 손 안의 또 다른 로봇! 로봇을 중심으로 보면, 사람이 여러 로봇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그 구도 속에 실은 뭔가가 하나 더 존재한다. 손에 들려 있는 로봇 곧 스마트폰 속의 콘텐츠가 그것이다. 그것이 있음으로 인해 휴대폰은 단순한 전화기를 넘어 스마트한 로봇이 될 수 있었다. 흔히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되면 사람들의 이목은 사양과 기능, 가격으로 쏠린다. 한결 편해지고 똑똑해진데다가 착하기도 한 가격대라야, 파는 쪽이나 사는 쪽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시된 신제품을 두고 펜에 셀카 셔터가 탑재됐고 배터리 용량이 늘어나는 등 기능과 사양이 향상된 만큼 가격 인상도 불가피하다는 말들이 나왔던 이유다. 흡사 스마트폰 하면 사양과 기능, 가격이 전부가 된 모양새다.
뭔가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가격은 차치할지라도 사양과 기능의 진보는 스마트폰이 인간 지능을 닮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고갱이다. 이들의 진전이 빠르고 능률적일수록 반려로봇으로서 스마트폰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그러니 사양과 기능을 중심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봄은 하등 이상할 바 없다. 다만 한결 나은 사양과 빼어난 기능을 도대체 무엇 하러 그리도 치열하게 도모하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최신 스마트폰을 찾는 까닭은 나아진 사양과 좋아진 기능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지, 그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은 아니기에 그렇다.
그래서 콘텐츠는 스마트폰에 처음부터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창출하고 활용하며 즐기기 위해서 스마트폰의 사양과 기능은 그 진전이 끊임없이 모색됐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콘텐츠가 그 안에서 빛의 속도로 상호 연동되고 작동되기에 쓸모 있는 로봇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속도가 빠르고 기능이 많을지라도 그런 속도와 기능으로 누릴 콘텐츠가 신통치 못하다면, 스마트폰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만다. 손 안의 로봇, 그 안에 있는 콘텐츠가 로봇의 사양과 기능을 증진케 하고 그 가치를 높여준 것이다.
여기서 반려로봇 스마트폰을 구현해낸 과학기술과 인문이 애초부터 한 몸이었음을 목도하게 된다. 우리가 콘텐츠라 부르는 것의 실상은 인문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셀카를 찍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과학기술이지만 셀카를 찍고 향유하고자 함은 인문적 욕망이다. 배터리 용량을 늘리는 것은 과학기술이지만 그 안에 맘껏 담고자 하는 바는 인문의 소산이다. 어떤 기능이든 또 사양이든, 개발부터 갱신에 이르는 전 과정이 과학기술과 인문이 복합적으로 작동된 결과였다. 이렇듯 인문은 과학기술의 외부로부터 끼어드는 변수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더불어 작동되는 상수였다. 과학기술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그것의 내부에 있었음이다.
과학기술뿐만이 아니다. 인문은, 인간이 문명을 창출해낸 그 최초의 순간부터 이미 사람의 삶과 사회에 곁들여지는 장식이 아니라 그들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였고 기능해왔다. 그래서 인문은 유사 이래 늘 인류의 공공재였다.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기에 모두가 갖다 쓸 수 있어야 하는 공동의 자산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인문에 대한 국가 사회의 소홀함은 금도를 지나쳐 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지금은 기술이 갈수록 인간을 닮아야 더 한층 선호되며 진보되었다고 평가받는 추세이지 않은가. 과학기술만으로 인간다움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함은 삼척동자조차 이해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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