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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 붐] 가족여행 ‘5개년 계획’ 세웠나요?

입력
2017.07.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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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녀 동반 여행객 4년새 44%↑

여행사들 새 주력상품으로 부상

가족 간 이해ㆍ신뢰 깊어지고

아이들 소통ㆍ공감능력 길러져

#2

6개월 전부터 항공권 예매ㆍ일정짜기

숙소보다 항공권 먼저 예약해야

자녀들 세상 경험하며 미래 결정

책ㆍ화보로 ‘추억 테라피’까지

첫 아이가 두 돌도 되기 전 시작한 가족여행이 올해로 17년째다. 매년 두 차례씩 다니는 가족여행은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간 사랑과 결속의 중심축이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엄마 이지영씨, 아빠 김대영씨, 큰 아들 민재군, 작은 아들 민우군. 배우한 기자
첫 아이가 두 돌도 되기 전 시작한 가족여행이 올해로 17년째다. 매년 두 차례씩 다니는 가족여행은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간 사랑과 결속의 중심축이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엄마 이지영씨, 아빠 김대영씨, 큰 아들 민재군, 작은 아들 민우군. 배우한 기자

고교 2학년과 초등 6학년의 두 아들을 둔 이지영(45)씨는 올 여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겨울에 떠날 발리행 항공권도 이미 사 뒀다. 매년 두 차례 나라 밖을 다녀 보자고 약속한 이씨 가족은 최소한 6개월 후 떠날 곳의 비행기 티켓을 품에 안은 채 살아간다. “항공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니까요. 편한 맘으로 어디 묵을지 숙소를 알아보고, 가려는 나라의 책과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보는 게 일상의 활력소가 되거든요. 가족여행 덕분에 가족들 모두 각자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고요.” 여행을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여행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침대에 큰 대자로 누웠을 때의 안락함도 너무 좋아한다”며 “아, 이 집에서 또 열심히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할 때의 행복도 크다”고 말했다.

이씨와 남편 김대영(49)씨는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 부부다. 여유가 있으니 여행을 많이 다니겠지 오해하기 딱 좋은 직업이지만, “미리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면 얼마든지 알뜰하고 실속 있게 여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가항공과 프로모션, 마일리지가 있고, 숙박비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각종 앱과 에어비앤비가 있다. 여행지를 1년 전, 늦어도 6개월 전에만 결정해 두면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선택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관건은 ‘정보’. 처음 갓난아기를 데리고 여행 다니며 정보 부족에 답답함을 느꼈던 이씨는 직접 모은 여행 정보들을 공유하기 위해 2004년 네이버에 여행카페 ‘아이와 함께 여행을’을 만들었다. 이 카페는 현재 회원 수 15만6,700여명의 유명 카페로 자리잡았다.

“아이들이 성인이 돼 자기 가정을 꾸리면 더 이상 부모랑 다니는 여행을 원치 않겠죠. 슬픈 일이지만, 저도 다 큰 아들이랑 다니는 여행이 뭐 재미있을까 싶고요.(웃음) 오늘이 제가 가장 젊은 날이니까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여행하고 싶어요. 여행이란 온전히 서로에게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가족여행, 여행 트렌드의 핵으로

연간 해외여행자 2,000만명 시대. 해외여행이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문장조차 낡았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9년 이후 여행문화는 한껏 성숙했고, ‘7박 9일 서유럽 6개국’ 식의 인증샷 찍고 돌아오는 초스피드 여행도 매력을 잃은 지 오래다. 배낭 하나 메고 나 홀로, 친구와, 연인과 떠났던 젊은 여행자들이 가정을 꾸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자유여행은 가족여행의 형태로 새롭게 발전했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사는 것에서 하는 것으로 소비의 트렌드가 변화함에 따라 여행은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빼놓을 수 없는 핵심요소로 자리 잡고 있으며, 여행산업의 중심축도 자연스레 가족여행으로 옮겨 가고 있다.

7일 하나투어에 따르면, 아동이나 청소년, 성인 자녀를 동반해 패키지나 자유여행을 떠난 여행객은 2012년 62만9,000명에서 2016년 90만3,000명으로 4년 새 44%나 급증했다. 2013년 10.5%, 2015년 18.4%, 2016년 8.9%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여행시장이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면서 패키지와 차별화된 ‘우리만의 가족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며 “가족여행이 여행사들의 새로운 타깃”이라고 말했다. 모두투어 관계자도 “현재 여행업계는 자녀의 연령대를 영유아, 초등학생, 청소년, 성인 등으로 나눠 맞춤형 상품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의 회원 증가세도 가족여행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004년 개설돼 2012년(6월 기준) 9만3,000명이었던 카페 회원은 2014년 12만명, 올 6월 15만7,000명으로 급증했다. 중2와 만 3세인 두 딸이 아기일 때부터 함께 여행을 다닌 주부 신수경(45)씨는 “2012년 5년 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보니 전과 달리 여행 예약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행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해졌는지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가족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설렘으로 가득한 준비와 계획 단계에 있다. 터질 듯한 기대와 설렘은 커리어를 끌고 도착한 인천공항에서 절정에 달한다. 향후 5년간 가고 싶은 여행지를 의논하고 있는 이지영(오른쪽 두번째)씨 가족. 배우한 기자
가족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설렘으로 가득한 준비와 계획 단계에 있다. 터질 듯한 기대와 설렘은 커리어를 끌고 도착한 인천공항에서 절정에 달한다. 향후 5년간 가고 싶은 여행지를 의논하고 있는 이지영(오른쪽 두번째)씨 가족. 배우한 기자

여행으로 키운 아이들

하지만 그것도 자녀들이 어릴 때까지 얘기다. 한국에서 가족여행이란 자녀의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온 구성원이 보류해야 하는 유예된 행복이다. 전국의 학원들이 일제히 방학에 돌입하는 8월 첫 주, 극성수기, 최고가, 사람 반, 물 반인 여행지. 입시 체제에 진입한 가족들에겐 즐거우려 떠났다 어쩐지 더 불쾌해져서 돌아오는 이 획일적 체험만이 유일한 여행으로 허락된다. 중2병으로 대표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아예 부모와의 여행 자체를 거부한다.

“실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가족여행이 더 필요해요. 저는 큰애가 고2 올라가는 지난 겨울에도 한 달간 가족여행을 함께했어요.” 태어난 이듬해 괌에서 시작된 이지영씨의 큰아들 민재군의 여행은 호주와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일본, 프랑스, 터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을 거치며 17년간의 주유로 이어졌다. 가히 여행으로 키운 아이다.

“아이들 학원을 하나도 안 보냈거든요. 과외도 한 달 해보더니 아닌 것 같다고 해 그만뒀고요. 학원비 쓸 돈을 여행비로 쓴 셈이죠.” 패션 MD가 되고 싶어 하는 민재군은 자율형사립고에 입학할 정도로 학업성적이 좋았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야’라는 생각에 올해 일반고로 전학,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 대학은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랜 여행의 ‘부작용’일까.

“아마도 상관 관계가 있겠죠. 일년에 한두 달은 한국 바깥에 살면서 세상은 무척 넓고, 삶은 다양하다는 것을 봤으니까요. 내가 꼭 여기서 이렇게 살지는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 같아요.” 한의사로 살며 직업 선택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적성과 기질임을 절감한 이씨는 아이의 선택을 100% 지지해 준다. “지금은 공부 잘하는 아이가 의사가 되지만, 의사란 무엇보다 애민정신이 강해야 하는 직업이거든요. 교사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데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지금은 안정적이고 퇴직 후 연금이 나온다는 이유로 하려는 아이들이 많잖아요.” 항상 아이에게 했던 말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야 나중에도 질리지 않는다”였다는 이씨는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애들이 그 일을 하며 어떤 기분, 감정으로 살아가게 될지를 부모가 충분히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트리트 패션에 관심이 많은 민재군은 최근 친구와 단둘이 일본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 없이 떠난 첫 해외여행이다. 여행비 마련을 위해 3월부터 석 달간 카페에서 5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집에서 나가 독립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그는 현재 위안부를 돕기 위한 휴대폰 케이스를 디자인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실제 제작ㆍ판매까지 해볼 계획이다. 초등 6학년인 둘째 민우군은 “외국 이곳 저곳에 살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어 작가가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엄마한테 작가나 만화가가 되면 출판사에 매일 나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꼭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유럽 같은 데 살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쓰고 싶어요.”

여행으로 키운 아이들의 특징은 진로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중학교 2학년인 신수경씨의 큰 딸은 학부모 상담에서 뜻밖의 칭찬으로 엄마를 뿌듯하게 했다. “아이가 소통을 참 잘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선생님께서 많이 하시더라고요. 여행 다니면서 엄마, 아빠랑 대화를 많이 하며 자란 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씨 가족은 올 여름엔 오사카로 떠난다.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큰 딸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휴양을 좋아하는 남편은 료칸을, 많이 걷고 많이 보는 것 좋아하는 신씨는 관광을 즐기며 여름 휴가를 보낼 계획이다.

반 년 먼저 사는 사람들

얼리 버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여행 준비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여기서 좋다는 건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많고 싸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것도 출발일로부터 6개월 이상 남았을 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항공사 프로모션 정보를 모아 팝업으로 띄워 주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면 믿을 수 없는 가격에 나온 항공권을 ‘득템’할 수 있고, 항공권 일정에 맞춰 숙박을 예약한 후 관광 일정을 짜면 성수기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저렴한 여행이 가능해진다. 항공사 프로모션은 1차가 수량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 특히 취항 기념 프로모션은 ‘헐값’이라 해도 좋을 정도라 도쿄 편도 항공권이 11만원에 나오기도 한다. 물론 삶의 시점이 이미 반년 앞을 내다보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여행을 마칠 때쯤이면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지 않나요? 그럼 바로 최저가 항공권을 노려 예약하는 거예요. 숙소보다 항공권을 먼저 예약하는 게 좋아요.” 이지영씨는 “요즘 에어비앤비에 나와 있는 집들은 예약 부도를 막기 위해 항공권 번호를 요구하는 곳도 있다”며 “항공권이 확정된 후 숙소를 알아봐야지 그 반대로 하면 너무 복잡해진다”고 조언했다. 일단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했다면 더 이상의 검색은 금물이다. 갑자기 반값으로 뚝 떨어진 티켓을 발견하는 순간, 여행을 망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항공권 예약은 다양한 ‘신공’이 발휘되는 강호 고수들의 각축장이다. 요새 떠오른 ‘꿀팁’은 카약닷컴이라는 사이트를 이용한 ‘카약신공’. 다구간으로 검색했을 때 말도 안 되게 싼 티켓이 곧잘 걸린다. 다구간 티켓이란 ‘인천~파리/ 런던~인천’처럼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다른 티켓을 말한다. 이때 출발지를 한국이 아닌 한국 근교의 다른 국가로 설정하면 티켓 물량도 많고 가격도 현저히 싸진다. ‘홍콩~인천~파리/ 파리~인천~홍콩’으로 설정해 한국을 경유지로 이용, 항공권을 싸게 구입하는 식이다. 홍콩 편도 티켓을 추가로 끊어 여행을 시작한 후 마지막 ‘인천~홍콩’ 구간은 다음 여행의 출발지로 설정하면 된다.

‘편도신공’은 국적 항공사가 외국에서 출발해 한국을 경유, 제3의 목적지로 향하는 항공권에 대해 마일리지를 적게 공제하는 것을 이용, 마일리지 항공권을 편도로 나눠 발권하는 신공이다. 예컨대 인천~홍콩 왕복은 3만마일, 인천~파리 왕복은 7만마일이 소요된다. 홍콩과 프랑스를 각각 다녀오려면 총 10만마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편도신공을 이용하면 인천~홍콩(1만5,000마일), 홍콩~인천~파리(3만5,000마일), 파리~인천(3만5,000마일)에 8만5,000마일만 쓰면 된다. 아시아나항공이 외국 항공사와 마일리지를 공유하는 스타얼라이언스 회원이라는 점을 이용해 한국 성수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외국 항공사를 통해 마일리지 항공권을 얻는 ‘스얼신공’도 있다. 다음 여행 일정이 반드시 존재하는, 끝없이 여행을 이어 가는 삶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신공’들이다.

대학생 아들 성창원(왼쪽)씨와 중년의 엄마 이동숙씨가 지난해 함께 떠난 배낭여행. 모자가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스위스 라보 지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창원씨 제공
대학생 아들 성창원(왼쪽)씨와 중년의 엄마 이동숙씨가 지난해 함께 떠난 배낭여행. 모자가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스위스 라보 지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창원씨 제공

다양한 욕구의 충돌과 조율

서강대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성창원(21)씨는 2015년 여름방학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오스트리아, 체코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아들과 엄마 모두 피아노를 치며 클래식을 즐기는 터라 선택한 여행지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캐나다와 미국 동부를 훑었으나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는 패키지 여행 이후 첫 가족여행이기도 했다. “고교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가족끼리 함께 한 시간이 적었거든요. 엄마가 먼저 제안하셨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시간이 될까 싶어 2주 반을 여행했어요.”

직장인 어머니 이동숙(48)씨와 대기업 임원인 아버지를 대신해 여행 일정은 성씨가 맡아 짰다. 하지만 여행 초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빈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씨는 “아들이 대학생 배낭여행 가듯 너무 빡빡하게 일정을 짰더라고요. ‘먹는 건 걸으면서 먹으면 되지’ 하면서 하루에 궁을 두 군데씩 돌아보는데, 아들은 혼자 멀찍이 앞서 가고 우리 부부는 뒤처져서 얼마나 조급하던지…. 시간이 지나니 아이도 화난 듯 말 한마디 안 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폭염에 배고픔까지 겹쳐 결국 폭발하고 말았죠.”

이씨는 “울며불며 가족 싸움을 벌인 ‘빈 참사’의 교훈으로 지난해에는 가족 합의 하에 여유 있지만 디테일하게 일정을 짜 성공했다”고 말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위스를 둘러본 지난해 가족여행은 테마를 정해 각기 원하는 것을 모두 충족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즉흥의 묘미를 즐기는 아버지를 위해 길 가다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 마시며 휴식 취하기, 모차르트 생가를 가려는데 갑자기 하이든하우스가 가고 싶다는 돌발적인 어머니를 위해 일정 없는 빈 시간 넣어두기, 영국의 전통시장을 둘러보고 싶었던 성씨를 위해 5개 시장 투어를 삽입하는 식이다.

“20년 넘게 함께 산 가족인데 이렇게 취향이 다른지 정말 몰랐어요. 빈 참사를 겪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게 이후 일상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돼요.” 아들 성씨의 말에 엄마 이씨는 “아이가 다 컸어도 가족여행은 꼭 필요한 것 같다”며 “함께 시행착오를 겪으며 우리 가족이 더 단단해진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지영씨 가족이 17년간의 여행 기록을 책으로 정리한 포토북. 종종 아이들과 책장을 들춰보며 여행의 추억을 나누다 보면 여행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박미소 인턴기자
이지영씨 가족이 17년간의 여행 기록을 책으로 정리한 포토북. 종종 아이들과 책장을 들춰보며 여행의 추억을 나누다 보면 여행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박미소 인턴기자

18번의 여름… 아니, 그 이상

아이들은 순식간에 자란다. 미국의 한 여행사가 내건 프로모션의 타이틀은 ‘18번의 여름’이다. 100세 인생을 산다 해도 자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여름은 고작 18번뿐이니, 아직 아이가 어린 지금 떠나라는 메시지다. ‘아이들은 기억도 못 한다, 쓸데없이 돈 쓰지 말라’는 조언은 어쩌나. “물론 기억은 못 하죠. 하지만 여행의 추억은 아이의 정서로 차곡차곡 쌓여요.” 가족여행 마니아 신수경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 가장 안타깝다”며 “여행에서 기억보다 중요한 게 바로 그 정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지영씨는 보다 단호하다. “저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여행해요. 아이들한테도 ‘너희는 떼어 놓고 갈 수 없으니 데려가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 가고 싶은 데 갈 거야. 잘 따라와’ 하고 제 맘대로 정하죠.(웃음)” ‘내가 너희를 위해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모네 작품을 기억 못 해?’ 따지는 것보다 훨씬 좋은 여행 철학이다.

“큰 틀은 제가 원하는 대로 정하고, 중간중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끼워 넣어요. 그래서 파리에선 센강 옆 공공수영장을 세 번이나 갔죠. 아이가 크면 하루쯤은 아이 맘대로 일정과 동선을 짜게 맡기기도 하고요.” 이때 중요한 것은 여행이 엉망이 되더라도 절대 아이 탓을 하면 안 된다는 것. 맡겨 놓고 꾸중하면 부모 자식간 신뢰만 깨진다. 못 마땅해도 참아야 한다.

“아이에게 아쉬움이 남았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효과라고 생각해요. 노력하면 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테니까요. 파리 노트르담성당 앞의 포앵제로를 밟으면 또 오게 된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너희는 분명히 여기를 또 오게 될 거야. 여기가 어딘지, 건축양식이 뭔지 아는 건 중요하지 않아. 다만 엄마랑 왔었다는 것만 기억해줘. 그럼 너무 좋겠어’ 얘기했어요. 나중에 자식들이랑 와서 ‘여기 할머니랑 왔던 데다’ 추억해 주면 좋겠다고요.”

이지영씨는 이 추억들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여행이 끝나면 늘 책을 한 권씩 만든다. 요즘은 포토북 제작 툴이 잘 나와 있어 30분이면 여행사진들을 넣어 뚝딱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이 장가갈 때 가져가도록 두 권씩 만들어 뒀다. “여행이란 일상에서 빠져 나와 서로에게 온전히 시간을 할애해 집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집중했던 시간들을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다는 게 여행의 묘미죠.” 캐나다 대륙횡단열차 안에서 1박 2일을 보내며 로키산맥을 여행했던 추억이 특히 좋았다는 이씨는 “여행이 끝나면 아이들이 먼저 언제 책 만들 거냐고 재촉한다”며 추억 테라피의 효력을 입증했다.

영국 라디오 방송에서 최고의 여행지를 뽑아달라는 이벤트를 열었을 때. 1등으로 뽑힌 추천지는 파리도 런던도 베니스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는 곳.” 거기가 바로 최고의 여행지였다. 꼭 해외가 아니어도 좋다. 18번의 여름, 아니 그 이상의 ‘최고의 여행’이 가족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란다. 떠나야 할 시간은, 지금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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