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소련군이 독일 제3제국 의사당을 점령했다. 졸지에 수상이 된 괴벨스는 바로 다음날 가족을 살해한 뒤 자살했고, 수도방위군과 서부전선, 동부전선 나치 사령부가 잇달아 항복했다. 유럽 전쟁이 끝난 것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5월 9일이었다.
전쟁 난민들이 줄지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무렵,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좀 더 근원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남아 다시 살 길을 찾을 것인가,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자기들만의 힘센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제3의 길, 복수의 길을 택한 이들이 있었다. “눈에는 눈”이라는 구약과 토라의 가르침 즉 성난 야훼의 복수였다. 전시 파르티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팔레스타인에서 건너온 이들 등 그렇게 모인 정예 50여 명은 스스로를 ‘나캄ㆍNakam(히브리어로 복수라는 뜻)’, 영어로는 ‘디 어벤저스 The Avengers’라 불렀다.
압바 코브너(Abba Kovner, 1918~1987)가 나캄의 리더였다. 흑해 연안 세바스토폴에서 태어나 리투아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전시 소련의 지휘를 받으며 파르티잔으로 활약했고, 45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유월절(逾越節ㆍ유대인 출애급 축일) 예배 연설에서 “나치에 대한 신의 복수”를 선언했다. ‘나캄’은 그들의 구호 “담 예후디 나캄 Dam Yehudi Nakam(유대인의 피에 대한 복수)”에서 나온 거였다.
그들은 고위 나치 전범들을 추적해 처형하거나 자살로 위장해 살해했다. 독일인들을 무차별 살육할 의도로 상수원에 독극물을 투입하려 했고, 전범 수용소 나치 친위대(SS) 병사들의 집단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들의 존재와 활동상은 띄엄띄엄 이런저런 책 등을 통해 개략적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전모, 특히 집단 독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 년이 지난 1998년, 나캄의 소조 리더였던 요세프 하마츠(Joseph Harmatz)의 회고록 ‘from the Wings; A Long Journey 1940~1960’이 출간되면서부터였다. 종전 당시 스무 살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하마츠는 자신이 46년 나치 친위대 집단 독살 작전을 지휘했노라 책에 썼다. 그는 이스라엘 비영리 국제유대인공동체 직업교육프로그램인 ‘월드 ORT(Obchestvo Remeslenogo Truda,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Skilled Trades)’의 유럽지역 사무총장을 지내며 유네스코 등 유엔 기구와 세계 여러 나라 정부ㆍ민간 기관과 협력 사업을 벌여온 유명인사여서 더 충격적이었다. 1998년 옵저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치가 학살한 유대인 숫자와 똑같은) 600만 명의 독일인을 죽이는 거였다. 나는 독일인과 나치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내 생각은 같다”고 말했다. 그가 9월 22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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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프 하마츠는 1925년 1월 23일 리투아니아 로키슈키스(Rokiski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료품 도매상이었고, 집은 꽤 부유했다고 한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리투아니아가 독일 지배에 들 무렵 가족은 수도 빌니우스(당시 Vilna)로 이주했고, 10대의 요세프는 소련 공산주의 청년정치조직 콤소몰(Komsomol)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가정은 41년 여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풍비박산 났다. 소비에트 군대에 입대한 형(43년 전사)을 뺀 온 가족, 즉 그와 동생, 부모는 빌니우스의 유대인 게토에 수용됐다. 그는 43년 9월 게토 소개(노동ㆍ멸절수용소 이동) 직전 몇몇 청년들과 함께 하수구를 통해 극적으로 탈출, 수도 남부 루드니키 숲 속 코브너의 파르티잔 부대에 합류했다. 훗날 그는 “우리가 빠져 나온 하수구는 너무 좁아 나중에 영화 ‘The Third Man(캐롤 리드 감독의 1949년 영화 ‘제3의 사나이’, 터널처럼 넓은 하수구 장면이 나온다)’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그 안에서 죽기라고 하면 뒷사람이 못 빠져 나오게 돼 자살도 할 수 없었다”(텔레그래프, 16.9.30)고 말했다. 아버지는 게토에서 자살했고, 동생은 학살 당했고, 어머니만 노동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종전 후 동생이 숨진 멸절수용소 참상을 전해 듣고 “복수하기 전까지 쉬지 않기로 결심했다”(WP, 16.9.28))고 그는 말했다. 파르티잔 활동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2차대전 중 가장 참담한 홀로코스트 피해를 입은 곳 중 한 곳이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여서, 유대인 4만 명 중 살아남은 이는 불과 수백 명이었다.(NYT, 16.9.29)
전후 하마츠는 어머니를 포함, 그들 생존자를 당시 영국령이던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남았다. “그 모든 살인과 대량학살에 대해 우리가 참고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복수 이전엔 쉬지 않겠다
홀로코스트 생존자ㆍ파르티잔
자살이나 교통사고 위장해
핵심 전범들 추적ㆍ살해
유대인 단결ㆍ건국 열정 북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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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11월 시작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어떤 유대인에게는 분통 터질만한 일이었다. 반대신문, 이의신청, 변론…, 재판 과정은 배심원단만 없을 뿐 미국의 민주적 형사재판 절차를 지켰다. 재판부는 1차 재판에 기소된 1급 전범 24명 가운데 괴링 등 13명에게만 사형을 선고했다. 2차 재판에는 185명이 피고석에 섰고, 사형을 선고 받은 건 25명이었다. 하마츠 같은 이들에게는 괴벨스나 괴링 못지않게, ‘내 가족’의 옷을 벗겨 가스실로 끌고 간 군인과 독가스 벨브를 연 군인들, 그들 곁에서 농담하며 킬킬대던 군인들도 죽여 마땅한 비인간이었을지 모른다. 연합국 공식 집계에 따르면, 나치 기관에 소속돼 일한 이들이 서독에만 1,320만 명이었고, 기소된 건 350만 명이었다. 그 중 250만 명이 재판 없이 풀려났고, 나머지도 대부분 벌금이나 재산 몰수형, 한시적인 공직 취업 제한 등 경미한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4년 뒤인 49년, 감옥에 수감된 나치는 300여 명에 불과했다. 수많은 악질 전범들이 신분을 바꾸거나 절차의 허술함을 틈타 피신했다. 사실 연합국으로선 개별 사안들을 일일이 들춰 조사하고 재판을 하는 것 자체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고, 특히 미국에겐 서둘러 서독 정부를 수습해 냉전의 방패로 내세우는 일이 더 급했다. 유럽재건프로그램인 마셜플랜이 가동된 것은 47년 6월이었다.(가디언, 2008.7.26)
“나치는 우리 아이들의 다리나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전봇대에 던져 죽이고는 소각로에 집어넣곤 했다.(…) 전후의 독일인들은 유모차에 애들을 태우고 다니며 배급된 우유의 지방 함량을 따져가며 먹인다고 하더라.”(WP 위 기사) 나캄의 그들 대부분은 가족 전부 혹은 일부를 그렇게 잃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신의 정의’를 위해 직접 나선 정황이 대충 그러했다.
나캄은 프랑스나 영국군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도피한 핵심 전범들을 추적해 자살이나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기도 했고, 병실에 잠입해 주사액에 석유를 주입해 죽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해한 이들의 숫자가 10여 명이라는 설부터 수백 명에 이른다는 설까지 있다. 당연히 나캄은 비밀 결사였다. 그들은 신분과 활동(범행) 일체를 감춘 채 비밀을 공유했고, 전설 같은 소문을 통해서만 제 존재를 드러내곤 했다. 그런 소문들은 유대인의 민족적 단결과 건국ㆍ시오니즘의 열정을 돋우는 데 기여했다.
●獨 5개 도시 상수원 독극물 계획
팔레스타인서 비소 운반 도중
리더 코브너 체포로 실패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주선說
●수용소 나치 친위대 독살 작전
1946년 비소 바른 호밀빵으로
수감자 2000여명 중독 시켜
“300~400명 독살”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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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캄의 첫 독일인 대량학살 계획은 뮌헨과 베를린 바이마르 뉘른베르크 함부르크의 5개 도시 상수원에 독극물을 투입하는 거였다. 하마츠는 당시 도시의 배ㆍ급수망 도면을 입수해 독일인 거주지 관로에만 비소를 투입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구체적 실행계획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다고 책에 썼다. 그 계획은 팔레스타인에서 대량의 비소를 구해 오던 코브너가 프랑스 행 선상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불발됐다. 코브너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추진하던 시오니스트 지도부와 협의했고, 48년 초대 대통령이 된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1874~1952, 그는 맨체스터 공대를 나온 화학자였다)의 주선으로 그 약을 구했다는 설이 있지만, 주요 외신은 바이즈만이 ‘플랜 B’만 승인했고 저 계획은 알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코브너가 체포된 경위는 확실치 않다. 그 엄청난 집단테러가 실행될 경우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대한 국제 여론이 악화할 것을 우려, 시오니스트 진영의 누군가가 밀고를 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플랜 B는 뉘른베르크 전범 중에서도 나치 친위대 대원 1만 5,000여 명이 수감돼 있던 ‘슈탈라크 13(Stalag 13)’을 겨냥한 작전이었고, 감옥에 있던 코브너 대신 작전을 지휘한 게 하마츠였다. 그들은 재소자용 빵 공장에 아리안계로 착각할 만한 외모를 지닌 나캄 대원 아리예 디스텔(Arye Distel)이라는 이를 위장 취업시켜 작전을 준비했다. 46년 4월 13일 밤 공장에 잠입한 디스텔과 3명의 대원은 2시간여 동안 그림 붓으로 비소와 풀을 섞어 반죽한 독극물을 검은 호밀빵(미군용은 흰 빵이었다고 한다) 3,000여 개에 발랐다. 빵 하나가 4인분이었다. 그 해 4월 20일자 AP는 미군 주둔군사령부 발표를 인용 “비소가 든 빵을 먹고 전범 수감자 1,900여 명이 중독돼 병원에 후송됐다”는 뉴스를 내보냈고, 23일자 뉴욕타임스에는 “2,283명이 중독돼 증상이 심한 207명이 병원에 후송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독극물로 숨진 사람 숫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하마츠는 “최소 300~400명은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작전은 그의 기준으로는 실패였다. 실패 원인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맛이 이상해서 수감자들이 덜 먹었기 때문이라는 설(비소는 거의 맛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도 있고, 빵에 발린 독극물이 치사량에 못 미쳤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AP가 최근 미국 문서보관소 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독극물은 약 6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이었다고 보도했다.(timesofisrael.com, 16.8.31) 나캄 대원들은 작전 직후 체코와 이탈리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피신했다.
하마츠는 혼자 남아 유럽과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의 귀국을 돕다가 50년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한 뒤 프랑스계 해운회사에 취직했고, 1960년부터 94년까지 월드ORT에서 일했다. 은퇴 직전 13년간은 런던 사무총장으로서 유네스코 등 유엔 여러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독일 등 여러 나라와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o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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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직후인 98년 출간한 그의 자서전은 충격적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회고록 속의 그가 아니라 ‘현재의 그’였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드레스덴 폭격 영웅인 ‘바머 해리스(Bomber Harris, 본명은 Arthur T. Harris, 1892~1984)의 흉상을 제막(1992)했을 때 나는 무척 기뻤다. 드레스덴 폭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물론 기뻤다. 복수란 바로 그런 거다.”(텔레그래프) “양심의 가책? 내가 나쁜 놈(bastard)인지 몰라도 가책 같은 건 조금도 없다. 양심의 가책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금세 과거를 잊는 이들)이 느껴야 한다.” “우리는 어벤저스였다. 불행히도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게 안타깝다.(…) 지금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NYT) 월드ORT 사업을 하며 독일과 협력한 데 대해서는 “세상이 달라졌고, 나는 내 조직에 충실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ort.org, 위 글) 뉘른베르크 검찰은 회고록 출간 직후 그와 디스텔에 대한 테러 혐의를 조사했지만, “특수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 기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2000년 5월 밝혔다.
코브너의 전기를 썼고, 나캄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라는 텔아비브 야드 바셈(Yad Vashem) 홀로코스트 추모센터 수석 사학자 디나 포라트(Dina Porat)는 지난 8월 인터뷰에서 “끔찍한 비극이 잊히고 있다. 범죄에 온당한 처벌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다른 범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들(나캄)이 원한 것은 정의뿐 아니라 세계를 향한 경고였다. 유대인을 다치게 하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라고 말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이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 손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거였다.”
얼마 전 작고한 온건파 정치인 시몬 페레스와 그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시민들이,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저런 생각을 품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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