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소영 기자

등록 : 2017.03.29 16:23
수정 : 2017.03.29 18:45

“성평등 교육하니 女 자신감 늘고, 男 여혐 발언 줄었어요”

[사소한소다]<29>초등5학년에게 성평등교육 1,600분 해 봤더니

등록 : 2017.03.29 16:23
수정 : 2017.03.29 18:45

‘나는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위인들은 유관순 열사만 빼고 나머지는 다 남자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여자 독립운동가에 권기옥 비행사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평소에 여자한테는 절대 안 어울리는 직업 중의 하나가 비행사라고 생각했다. (중략)여자는 조금 손재주가 뛰어나거나 만들기를 잘해서 디자이너처럼 만드는 직업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권기옥 언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잘 돌보고 독립운동도 하고 자신의 꿈도 이루었으니 정말 멋지신 것 같다’

이 내용은 지난해 서울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수업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 여사를 다룬 그림책 ‘니 꿈은 뭐이가?’를 읽은 학생들의 소감문 중 일부다. 이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한 서한솔 교사는 “교과서 속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외에 찾기 힘든 상황에서 성평등 교육을 위해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교재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2014년 서울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교실에서 진단활동 수업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 교사가 담임을 맡고 있던 5학년 한 반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총 40차시에 가까운 성평등 수업을 진행했다. 1차시 당 40분, 시간으로 따져도 총 1,600분에 육박한다. 교육 효과는 수치로도 확인됐다. 서 교사가 올해 2월 자신의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인식조사’를 진행한 결과, 지난해 5월에 비해 남녀 학생 모두 성별에 대한 편견이 10% 이상 향상됐다. 특히 남학생의 경우 기존에 나타났던 여성에 대한 편견 뿐 아니라 ‘남자는 힘이 강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이 중요하다’, ‘남자는 미래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필요가 있다’ 등 남성 성역할에 대한 편견도 상당히 해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 5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1~14번까지 총 14항목으로 구성된 성평등 인식조사 설문지. 성편견이 클수록 '매우 그렇다',작을수록 '전혀 그렇지 않다'에 표시한다. 초등성평등연구회 제공

서한솔 교사가 2016년 맡았던 5학년 3반 남학생들의 성평등 인식조사 결과 변화. 가로축은 성평등 인식조사 문항 번호. 전체 답변수를 100%로 놓고 항목별로 응답한 답변의 비율을 각기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초록색이 진해질수록 성편견이 해소되고 붉은색이 진해질수록 성편견이 강화됐음을 나타낸다. 초등성평등연구회 제공

서한솔 교사가 2016년 맡았던 5학년 3반 여학생들의 성평등 인식조사 결과 변화. 가로축은 성평등 인식조사 문항 번호. 전체 답변수를 100%로 놓고 항목별로 응답한 답변의 비율을 각기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초록색이 진해질수록 성편견이 해소되고 붉은색이 진해질수록 성편견이 강화됐음을 나타낸다. 초등성평등연구회 제공

뽀로로 속 성차별 분석, ‘고용게임’ 등 사회 속 성차별 교육교재 개발

서 교사가 성평등 교육을 진행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5월 발생한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다. 사건 직후 초등교사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에서도 여성혐오 현상 논쟁이 활발해졌다. 초등학생들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심각한데 교과서에선 그릇된 고정관념을 교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문제의식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교과서 속 성차별, 그릇된 고정관념 확대 재생산” ) 서 교사는 지난해 6월 10여명의 초등교사 등으로 구성된 ‘초등성평등연구회’(이하 연구회)를 만들고 현재까지 정기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연구회 참여 교사들은 한 달에 한 번 정기모임에서 수업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교재를 개발했다. 정해진 학습목표에 맞춰 보조 교재로 성인지적 관점을 담은 글 등의 활용방안을 고민하는 식이다. 서 교사는 “5학년은 사회과목에서 처음으로 역사를 배우는데, 교과서에 여성 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성평등 수업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선생님도 여성 위인들을 너무 몰라서 그 동안 여러분에게 불공정하게 가르친 것 같다. 남성 위인과 여성 위인을 1대 1로 가르치겠다’고 말하고 보조 교재로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엮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교사들은 국어 과목에서 ‘비판적으로 영상매체 감상하기’를 주제로 ‘드라마 속 남녀 출연자들의 손목잡기 동영상을 보고 생각과 느낌 나누기’를 진행하고, ‘주장하는 글쓰기’ 시간에는 ‘뽀롱 뽀롱 뽀로로’ 등의 캐릭터 소개를 분석해 학생들이 어린이 프로그램의 성차별을 인식하도록 했다. 또 경제를 배운 고학년을 대상으로 ‘고용 게임’을 만들어 여성이 취업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경험해보고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우리말 고운말’ 단원에서는 학생들이 온라인 게임을 하며 많이 쓰는 여성멸시적 욕설의 의미를 배우고 유튜브 영상 댓글에 달린 욕설들을 신고하는 활동을 했다.

초등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성인지적 관점에서 미디어 감상하기' 관련 국어과 교수 학습 과정안. 초등성평등연구회 제공

어린이프로그램 '뽀롱뽀롱 뽀로로'의 캐릭터 소개를 보고 캐릭터의 색상, 의상 등을 분석하게 한 자료. 초등성평등연구회 제공

어린이 프로그램의 캐릭터 소개를 분석하고 이에 대해 쓴 학생의 글. 초등성평등연구회 제공

남녀 함께하는 체육수업에 여학생은 자신감↑

게임하던 남학생 욕설 자제하기도

수업 효과는 서서히 교실 문화도 바꿔 놓았다. “여자가 이걸 어떻게 해요”라며 한 발 물러서던 여학생들은 자신감이 붙었다. 서 교사는 “체육 수업시간에 보통 남녀를 나눠서 수업을 하는데, 발야구를 남녀가 함께 하게 했다. 처음엔 ‘남자들이 찬 공을 어떻게 받아요’라던 여학생들도 ‘체육은 여학생이 당연히 남학생보다 못해’, ‘여학생들은 체육시간에 앉아서 쉰다’ 등 체육수업에 반영되는 성편견에 대해 공부해보고 계속 발야구 연습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남학생들은 여성 혐오적 욕설에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서 교사는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베스트를 보면서 평소에 ‘여자는, 남자는, 자고로’ 등의 표현을 많이 쓰던 한 남학생은 수업을 하면서 성편견을 담은 언어 사용이 많이 줄었다”며 “유튜브 혐오 댓글 신고하기를 배운 한 학생은 ‘(온라인에서)욕을 하고 싶었지만 누가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았다’는 내용의 일기를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학 단톡방 성폭력 사건, 공교육의 성평등 교육 부재 탓”

서 교사는 최근 대학 내 단체카톡방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들을 보면서 초등생 성평등 교육이 시급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몇몇 대학들은 교사나 학부모가 꿈꾸는 공교육의 성공 사례 같은 곳인데 성폭력 발언을 하는 대학생들의 인식에는 성인지적 관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며 “공교육에서 이들에게 성인지적 교육을 하지 않고 성차별에 대해 가르치지 않은 결과”라고 말했다.

혐오표현이 만연한 온라인 문화를 접하는 연령이 점점 어려지는 것도 제대로 된 성평등 교육이 시급한 이유다. 최근 초등생들은 유명 유튜버, 1인 방송 진행자(BJ)들을 흉내 내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명 오버워치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의 영상에서도 여성혐오적 발언은 빈번하게 등장한다. 서 교사는 “중학생 이상이면 이미 자신이 구축한 사고방식을 깨기가 상당히 힘들기에 초등교육부터 기본적 인식 틀을 건전하게 갖춰야 중학생이 돼서 혐오표현을 접해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2016년 발간된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교과서에서 과거와 오늘날 가사 노동을 비교 설명하며 노동의 주체를 모두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제공

많은 교사와 학부모들이 문제의식에 동감하지만 아직 학교의 성평등 교육은 크게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 교사는 “연구회 교사들과 함께 교재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성평등 교육이 ‘남자가 조용히 소설책 읽는다고, 여자가 축구한다고 놀리면 안돼요’ 수준의 개인적 편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며 “압도적인 여성범죄 피해, 불공평한 양육시간 등 사회적 문제로서의 성차별을 다루지 않으니 해결방안 역시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현 성평등 교육의 한계라고 느꼈다”고 지적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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