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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 '종이길'을 만든 건 팔할이 고선지였다?

입력
2016.05.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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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여인이 사마르칸트 외곽의 한 종이공장에서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다./2016-05-18(한국일보)
우즈베키스탄 여인이 사마르칸트 외곽의 한 종이공장에서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다./2016-05-18(한국일보)

중앙아시아로 분류되는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도시 사마르칸트 외곽의 종이공장에 도착한 것은 2013년 10월의 어느날이었다. 가이드를 졸라 일정에도 없는 비포장 골목길을 이리 꺽고 저리 돌아 담도 대문도 없는 공장 마당으로 쑥 들어섰다. 단층 건물이 작은 연못 뒤편에 서 있고 물레방아와 디딜방아가 우리네 시골을 느끼게 하는 이곳 한켠에는 중년의 여인이 이방인의 어수선한 발길에도 아랑곳없이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가내수공업 형태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유일하고, 중앙아시아를 통틀어서도 하나 뿐인 종이공장이었다.

인류 4대 발명품의 하나인 종이가 서쪽 세계로 전파된 현장이 바로 사마르칸트였다. 751년 7월 이 일대에서는 당나라가 이슬람의 압바스왕조와 일전을 벌였다. 일명 탈라스전투로 불리는 문명간 충돌이었다. 5일간의 전투에서 압바스왕조 이븐 살리히 장군에게 무릎을 꿇은 이는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755) 장군이었다.

제지술이 서역으로 전파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탈라스전투 당시 고선지 휘하의 병사 2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제지술이 덩달아 넘어간 것은 어느 쪽의 작전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다. 여기다 당시 포로 중 고구려 유민도 상당수였던 것으로 추정되면서 고구려와 제지술의 전파에 함수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668년 멸망한 고구려 백성 70여 만명 중 30여 만명이 당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포로인 고구려인에게 가장 빠른 신분상승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고, 고선지의 부친 고사계도 중원으로 이주해 무인이 됐다. 고선지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아랄해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까지 복속시키는 등 서역 평정의 일등공신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탈라스의 패배만큼 인류에 공헌한 전투는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탈라스전투 후 서역에서는 처음으로 사마르칸트에 종이공장이 생겼다. 당시 이 도시를 끼고 흐르는 시압강 유역에는 종이공장이 무려 300여 개나 들어섰다고 한다.

이날 찾은 종이공장은 1998년 문을 열었다. 전통제지술 보유자인 50대 초반의 묵도로프 자리프씨는 “종이공장이 현대화 물결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보고 옛날 방식의 공장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중년의 여인이 벗기던 뽕나무 껍질은 촉촉했다. 뽕나무 껍질은 소쿠리 단위로 끓는 잿물 속에 6, 7시간 푹 담긴다. 깨끗한 물로 씻어낸 이 섬유는 체에 걸러진 후 마르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곤 두 널판상자 속에 끼워 물기를 빼낸 후 나무판 위에 말리면 종이가 되는 것이다. 건물 안에는 이 종이를 조개껍데기로 문지르는 청년이 있었다. 옛날 방식 그대로라고 했다.

사마르칸트의 명물인 레기스탄광장
사마르칸트의 명물인 레기스탄광장

사마르칸트에도 비단은 넘쳤다. 동서 문명교류의 상징으로 비단이 간택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실크로드’라는 이름의 창시자인 독일의 리히트 호펜이 이 길을 ‘페이퍼로드’, 종이길이라고 불렀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105년 중국 후한의 채륜이 뤄양에서 발명한 종이는 탈라스전투를 계기로 서역으로 넘어갔다. 제지술은 몇 백년에 걸쳐 바그다드와 카이로 등 아랍-이슬람권으로 퍼졌고,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스웨덴 등 유럽으로 전파됐다. 17세기 후반에는 미국 등지로 전파되면서 종이가 전 세계 기록매체로 자리잡게 됐다.

우리나라에도 4세기 중반 불교를 따라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의 시대는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글과 그림, 동영상까지 디지털화되는 세상이다. 돈도 종이에서 전자화폐로 바뀌고 있다.

7세기 후반 사마르칸트의 벽화에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 2명(오른쪽)이 선명하다. 이 벽화는 아프라시압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7세기 후반 사마르칸트의 벽화에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 2명(오른쪽)이 선명하다. 이 벽화는 아프라시압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세상을 바꾼 종이와 디지털의 운명을 저울질하다 사마르칸트 도심에서 동북 방향으로 10㎞ 떨어진 아프라시압 언덕까지 와버렸다. 1965년 구 소련 학자들이 이 언덕을 발굴할 때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당시 칼과 은화, 칠보꽃병, 채문토기, 귀금속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마르칸트 통치자의 집 안에 있던 벽화 하나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언덕에는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 맞은편 전시실로 들어가보니 당시 발견된 벽화가 옮겨져 있었다. 맞은편 황토와 붉은색 계통의 서벽에는 7세기 후반 사마르칸트 왕 와르후만에게 시집가는 차가이나 공주의 결혼식 장면이 담겨있었다. 벽화 속 12명의 외국 사절단 행렬에는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선조들도 있었다. 상투머리에 새의 깃을 꽂고 있는 모자인 조우관, 둥근 머리에 M자형 장식이 칼집에 있는 환두대도는 고구려인의 대표 양식이었다.

조우관은 실크로드 중심도시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 시안의 산시역사박물관 2층 전시실 한켠에서 봤던 그림 한 장도 마찬가지였다. 장회태자묘의 동쪽 벽에 그려진 ‘예빈도’에는 두 개의 깃털이 달린 조우관을 쓰고 붉은 옷깃의 흰색 도포와 황색 가죽신을 신은 신라사신이 서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중국 둔황의 막고굴 벽화 중 조우관이 그려진 그림은 40곳이나 된다고 한다. 보통 2개의 깃털을 꽂지만 4개도 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는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므로 그 날개털을 꽂아 장식한다’는 대목이 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있던 고구려 사신은 교통도 험난했던 7세기에 왜 사마르칸트까지 갔을까. 연개소문이 집권 후 당을 견제하기 위해 원교근공에 입각한 외교술을 폈던 것인가.

선조들의 발자취가 벽화로 남아있는 둔황과 사마르칸트 등 실크로드 도시들은 지금도 선뜻 가기 힘든 곳이다. 베이징이나 시안을 경유, 중국 국내선으로 가거나 우루무치에서 기차로 가는 둔황,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비행기나 기차로 달려야 하는 사마르칸트는 큰 맘 먹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여행의 사각지대기도 하다.

그 곳에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고구려와 신라가 있었다.jhjun@hankookilbo.com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실크로드 도시인 부하라에서 한 할머니가 쌍둥이 손주들과 동네를 돌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실크로드 도시인 부하라에서 한 할머니가 쌍둥이 손주들과 동네를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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