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제자 빌 비올라 개인전
검은 액체에 흠뻑 젖어 있는 한 남자가 조용히 서 있다. 물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물줄기가 위로 솟아오른다. 폭포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로 오른다. 남자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끌어안기도 한다. 액체의 색은 검은색에서 붉은색으로, 흰색으로, 다시 투명한 수증기로 점점 밝아진다. 모든 물줄기가 사라지고 깨끗해진 남자는 머리 위로 조용히 흩어지는 부드러운 안개를 들이마시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영상작가 빌 비올라의 8분짜리 작품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은 남자에게 물을 쏟아 놓고 거꾸로 돌린, 어찌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영상이다. 하지만 이 영상이 높이 5미터짜리 스크린에 재생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장엄함에 절로 빠져들고 만다. 동양 선(禪)사상의 영향을 받은 비올라는 “모든 인간의 삶은 고통이고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며 “사람에게 스스로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의지와 희생 정신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도치된 탄생’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희생의 끝에 온 구원이자 새로운 탄생이다.
5일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비올라의 개인전에는 모두 7편의 영상작품이 소개됐다. ‘도치된 탄생’은 전시 작품 중 짧은 축에 속한다. ‘조우’‘가녀린 실’‘내적 통로’ 등은 20여분에 걸쳐 황량한 평야를 건너오는 사람들을 넋 놓고 바라보게 한다. 영상 속 주인공들이 서로의 손을 잡는, 혹은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는 순간 영상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비디오아트를 ‘시간의 예술’이라 한 백남준의 조수로 일했던 비올라는 짧은 순간을 길게 늘여 그 의미를 극대화한다.
비올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핵심인 영혼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인생에서 기나긴 고통 끝에 의미 있는 순간은 아주 짧게 왔다가 간다. 화려하고 빠른 이미지에 익숙한 이 시대에 비올라의 작품은 언뜻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선보이는 ‘영혼의 여행’을 끝까지 뒤쫓아가 보면 알 수 없는 힘의 원천에 도달하게 된다. 전시 5월 3일까지.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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