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와 노예무역 통해 팽창한 서아프리카 아샨티 왕국 등 통해
서구 주도 근대화·착취 도식 탈피, 역사인식 새로운 틀 개척
한국인들이 배우는 세계사는 서구 중심, 정치 중심 역사다. 세계가 그렇게 구성됐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와 근대 국가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결과 근대 이후 세계사는 흔히 발전된 서구가 덜 발달된 비서구 지역으로 진출해 이들 지역을 근대화하고 착취했다는 도식으로 이해된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릭 울프는 이 도식을 비판한다. 그의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객체로 남아 있던 비서구의 ‘역사 없는 사람들’을 다시 조명하고 그들에게 제 몫의 역사를 돌려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1400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무역이 산업혁명으로 귀결되고 그 효과가 다시 전세계로 파급되는 장대한 역사를 서술한다.
우선 울프는 1400년 이전 유럽 밖의 세계가 독자적인 사회경제 체제를 수립하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폭력적으로 파괴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서구와의 교역을 위해 비서구 지역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서구와 연합해 자신들의 사회와 문화를 변형해 갔는지를 살핀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은, 북아메리카의 모피, 아프리카의 노예 무역이 토착민들의 삶을 바꿔놓은 과정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 사회체제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몰고 온 전염병으로 파괴됐다. 이후 원주민 노동자들은 은광 주변에 ‘프린시팔’ 혹은 ‘쿠라카스’라 불리는 마을 공동체를 형성했다. 마을 공동체의 지배자는 원주민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관리들과 결탁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통치권을 강화했다.
아프리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유럽인이 노예무역에서 맡은 역할은 투자와 무역 조직뿐이었다. 노예를 포획, 운송, 통제하는 일은 아프리카인들이 맡았다. 그 반대급부로 유럽의 자본과 무기를 얻어내는 것이 권력을 쥐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서아프리카 황금 해안의 아샨티 왕국과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오요 왕국은 노예 무역과 함께 팽창한 국가들이었다.
북아메리카인들의 삶은 모피 교역으로 크게 바뀌었다. 모계 중심이었던 공동체가 모피 사냥을 할 수 있는 남성 중심으로 재편성됐다. 총과 말이 등장하고 가죽과 고기를 노린 들소 사냥이 성행하자 다코타 족은 전통적인 혈연 관계를 통한 결속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종교 의례를 재편성했다.
이렇게 1400년부터 유럽인들이 일으킨 거대한 교역의 소용돌이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시켰다. 세계를 누빈 상인들은 새롭게 축적한 부를 세습하지 못하고 재투자해야 했다. 상업 자본이 생산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생산의 전 과정이 집적된 작업장 즉 공장이 탄생했다. 자본주의의 등장이다. 서구의 힘으로 이룩했다고 생각한 자본주의는 세계 각 지역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울프는 나아가 자본주의가 세계 각지의 농업을 특화하고, 한 지역에 머물던 노동자들을 세계 각지로 이주시키면서 인종 간 차등을 두는 ‘분할 지배’전술로 노동자들을 더 쉽게 통제하려 하는 모습을 그린다.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은 1982년 처음 출판된 인류학계의 고전이다. 그 이후 33년간 세계는 급격히 변했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훌륭한 역사 입문서다. 서구와 정치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탈피해 경제와 문화 등 다양한 차원의 행위자들이 관여하는 세계사를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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