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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ㆍ장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펼치다

입력
2016.04.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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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을 권력의 도구학문에서 저항과 계급적 각성의 학문으로 이끈 게 비판지리학의 공로라면 도린 매시는 자본ㆍ계급뿐 아니라 인종 젠더 등 다양한 권력 관계가 그 안에 중첩돼 있음을 알게 했다. 그는 공간(장소)이란 사건의 배경이나 무대처럼 정태적인 게 아니라 사회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끊임없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재개념화했다. 사진 britac.ac.uk에서.
지리학을 권력의 도구학문에서 저항과 계급적 각성의 학문으로 이끈 게 비판지리학의 공로라면 도린 매시는 자본ㆍ계급뿐 아니라 인종 젠더 등 다양한 권력 관계가 그 안에 중첩돼 있음을 알게 했다. 그는 공간(장소)이란 사건의 배경이나 무대처럼 정태적인 게 아니라 사회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끊임없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과정이라고 재개념화했다. 사진 britac.ac.uk에서.

전통적으로 지리학은 제국주의 식민지 개척의 도구로 각광받으며 성장했다. 1930년대 논리실증주의와 과학적 가설 검증이론 등이 결합하면서 등장한 이른바 ‘공간이론(과학)’역시 도구적ㆍ기술적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반발해 1970년대 이후 떠오른 분야가 비판지리학이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y, 1935~) 등 비판지리학자들은 마르크스 계급이론 등 다양한 비판적 사유와 개념들을 공간 연구에 수용해 도시화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이 공간적으로 구현되는 과정, 즉 지구적 불평등 성장과 지역 격차ㆍ차별 등을 이론화해 인문ㆍ사회과학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공간, 장소, 젠더>(정현주 옮김, 서울대출판문화원)의 저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비판지리학계의 가장 논쟁적이고 전복적인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혀왔다. 그는 보수 공간이론학계는 물론이고 하비류(流)의 주류 비판지리학에도 맞섰다. 예컨대 그는 공간과 권력의 상보관계, 즉 공간이 권력을 만들고 권력이 공간을 규정하는 거시적ㆍ미시적 현실들을 자본ㆍ계급 문제로 치환해온 좌파의 도식적 관성을 비판하며, 그 안에 도사린 계급 인종 젠더 국적 등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권력 요소들을 젠더적 관점에서 분석했다.(그래서 책 제목이 <공간, 장소, 젠더>다.) 공간ㆍ장소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이해, 새로운 공간적 상상력을 선사한 그가 3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도린 매시는 1944년 1월 3일 잉글랜드 북부 공업도시인 맨체스터 위센쇼(Wythenshawe)의 대규모 공영주택단지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성장했고, 맨체스터 여고를 나와 장학금으로 옥스퍼드대 세인트휴즈칼리지 지리학과에 진학했다. 고색창연한 대학 캠퍼스에서 그는 자신이 허락 없이 어떤 공간을 침범한 듯한 느낌을 받았노라고 훗날 말했다. “레드클리프 광장(Radcliffe Squareㆍ대학 중심부 유서 있는 광장이라고 한다)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가(…) 그 공간이 상징하는 바(아마도 봉건군주제)에 소외감도 들고 화도 났다.(…그래서) 열렬한 사회주의자가 됐다.”(텔레그래프, 2016.3.21) 하지만 그 ‘각성’의 뿌리는 훨씬 전, 아마도 쇠락한 공업도시의 콘크리트 규격화한 동네에 갇힌 유년의 기억에 닿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여행길, 숲 속의 아담하고 자족적인 마을과 그 사이로 이어진 부드러운 흙길을 걸으며 그는 자기의지와 무관하게 고향의 고전적 도상(classic iconography)이라 할 만한 그 풍경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고도 했다.

매시는, 정현주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적을 알아야 정복할 수 있다는 신념 하에” 공간과학의 요람인 펜실베이니아대로 유학(71~72)을 떠나 지역학을 전공했다. 런던환경연구센터(CES)에서 도시와 지역 문제를 연구했고(68~82년), 대처 정부가 82년 CES를 폐쇄하자 런던개방대학(Open Collage)으로 자리를 옮겨 2009년 정년 퇴임했다. 사회학자 힐러리 웨인라이트(Hilary Wainright, 1949~)에 따르면 매시는 옥스퍼드대가 교수직을 제의하자 “너무 배타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라며 거부했고, 영국 왕실이 대영제국훈장(OBE) 주려 했을 때는 거꾸로 저명한 훈장 거부자인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 1936~) 등과 연대해 왕실 폐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opendemocracy.net, 2016.3.15) 그는 지리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보트랭 뤼드 상(Prix Vautrin Lud, 98년)’을 탔다.

매시에 따르면 모든 공간ㆍ장소는 “동적인 무엇도 없이 다만 무기력하게 주어진 평면”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즉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다.(역자에 따르면 “매시의 공간적 사유에서 공간과 장소는 개념적으로만 구분될 뿐 현실에서 만나는 모든 공간은 사실상 장소”다.) 다시 말해 한 장소는 단순한 기억의 정원이나 현상ㆍ사건의 정태적 무대ㆍ배경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권력관계가 얽혀 있는 ‘특정한 접합점’이자 다른 접합점들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마르크스 교환이론이 자본을 사물이 아니라 과정으로 개념화한 데 착안한 거였다. 책 279쪽)

그는 ‘공간’의 일부 혹은 하위개념으로 밀쳐졌던 ‘장소(Place)’와 ‘로컬리티(Locality)’를 비판지리학의 중심 범주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주류 비판지리학은) 보편(추상)과 특수(구체)를 규모의 대소(예컨대 글로벌 대 로컬)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작은 것은 추상성과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는 잘못된(젠더적) 이분법”에 사로잡혔고, 그 결과 “장소의 정치적 파급력을 폄하했다”고 비판했다.

매시에게는 공원의 후미진 벤치도, 집과 도시도, 심지어 지구도 ‘장소’였다. 그리고 모든 스케일의 장소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계급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권력들이 동시적ㆍ중층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책 6장 ‘지구의 장소성’에서 그는, 교통ㆍ통신의 발달에 따른 지구의 시공간 압축이 개인과 집단의 정보 접근성을 차별화하고 심화하는 것은 비싼 항공권을 사고 못 사는 문제(곧 돈)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많은 요인 중에는 가령 인종과 젠더도 있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지, 또는 밤중에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지, 또는 외국 도시에서 호텔을 전전할 수 있는지 여부는 단순히 ‘자본’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수많은 조사들에 의하면, 가령 여성의 이동성은 ‘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성에 의해 더욱 제약된다고 한다.(물리적 폭력에서부터 추파를 던지거나 단순히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은 수도 없이 다양하다.)”(책 265쪽) 앞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란 책에서 변혁을 위한 좌파 진영의 연대를 이야기하며 “진정한 무지개 연합의 가능성이야말로 통일된 정치를 규정한다. 그러한 정치는 불가피하게도 계급이라는 관습적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계급이야말로 차이 안에서의 공통된 경험을 규정하기 때문이다”라고 쓴 바 있다.(441쪽)

중요한 것은 누가 ‘비행기’를 타고 못 타느냐가 아니라, 누가(어떤 권력이) 그 차별을 양산하고 통제하느냐의 문제다. 그것을 매시는 권력의 지리학(geography of power), 권력의 기하학(Power Geometry)이라 불렀다. 그의 개념들은 <젠더, 정체성, 장소>(여성과공간연구회 역, 한울)의 저자인 린다 맥도웰(1949~) 등의 페미니즘지리학과의 협업 속에 심화했고, 1990년대 이후 여성 이주노동 연구 특히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연구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2013년 6월의 도린 매시. 그는 다양한 저술ㆍ강연을 통해 상식에 스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했다. 유튜브 화면.
2013년 6월의 도린 매시. 그는 다양한 저술ㆍ강연을 통해 상식에 스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폭로하기도 했다. 유튜브 화면.

매시는 2013년 1월 ‘Social Science Bites’ 인터뷰에서 공간은 근대의 인문ㆍ사회과학이 편애해온 ‘시간’못지않게 “우리의 삶과 사회를 해명하는 데 무척 중요한 분석 대상”이며,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며 중첩되듯이 공간 역시 중첩되는 차원들을 지닌다고, “같은 시간의 런던과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의 공간도 있다”고 말했다. “공간의 다차원성ㆍ중첩성은 우리에게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나아가 지금 우리가 어떻게 더불어 살고 있는지 근원적인 정치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socialsciencespace.com, 2013.2.1) 그에게 장소는 한 국가가, 또는 지역사회가, 특정 인종ㆍ성별의 개인이 다른 국가ㆍ사회ㆍ개인과 관계 맺는 방식, 그 관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권력과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드러나는 거울이었다.

‘거울’의 예로 그는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결절(장소) 가운데 한 곳인 런던 카나리 워프(Canary Warf)를 들었다. “그곳은 주요한 금융 기관ㆍ기구들이 밀집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 신자유주의의 심장부라는 우리의 인식을 통해 그 이념과 가치를 전파하는 세계의 거점이 된다. 그 힘은 경제적인 힘인 동시에 정치적인 힘이고, 이념적인 힘이다.”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자율성을 중시한 알튀세리언으로서, 그는 대처리즘(신자유주의)의 평면적ㆍ폐쇄적ㆍ정태적 공간에 갇힌 상식과 상상력- 경제 용어들의 왜곡된 개념-을 매섭게 공격했다. 예컨대 동시대 지구의 모든 나라를 선진국- 개발도상국- 저개발국의 단일 역사궤적 위에 배치하는 것은 개도국ㆍ저개발국에게 선진국이라는 ‘하나의 미래’를 강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금 아르헨티나와 여러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처럼 ‘우리는 당신네 모델의 ‘선진국’이 아니라, 보다 평등하고 공동체적인 선진국이 되길 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이 시간에 종속되고 지리학이 역사에 종속될 경우 그런 다양성의 가능성은 부정된다. 공간의 다양한 차원들을 진지하게 인식해야만 정치의 대안적 가능성들이 열린다.”

은퇴 후에도 그는 글과 강연으로 내내 분주했다. 2013년 6월 가디언 칼럼에서 매시는 한 화랑에서 겪은 속상한 일을 전했다. 어떤 청년과 전시를 두고 유쾌한 대화를 나눴는데, 나중에 보니 청년의 티셔츠 등에 ‘고객 상담(customer liaison)’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더라는 거였다. 예술적 경험이 상거래의 일부로 하찮아져 버린듯한 기분, 병원에서나 학교에서나 소비자ㆍ고객으로만 존재하게 된 현실을 그렇게 환기했다. “선성장- 후분배도 이제 신자유주의자나 사민주의자 모두가 공유하는 목표가 된 듯하다.(…하지만) 거기에는 성장은 불평등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가 내포돼 있다. 불평등 성장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다.” 학교를 짓는 것은 (긍정적 의미의) ‘투자’이고, 교사에게 월급을 주는 건 (부정적 뉘앙스의) ‘지출’로 규정하는 것도 결코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우리는 경제적 용어들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되짚어보고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2011~12년의 ‘Occupy London’. 매시는 증권거래소와 성바오로대성당 주변의 텐트 시위농성장을 지배질서에 대해 내민 가운뎃손가락이라고 말했다. occupylfs.org에서.
2011~12년의 ‘Occupy London’. 매시는 증권거래소와 성바오로대성당 주변의 텐트 시위농성장을 지배질서에 대해 내민 가운뎃손가락이라고 말했다. occupylfs.org에서.

매시는 영국 노동당수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 1949~)의 열성 지지자였다. 코빈이 이즐링턴 북부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건 83년이었고, 대처의 탄광 구조조정ㆍ민영화 발표로 1년여 간의 장기 석탄 파업이 시작된 건 84년이었다. 파업 기간 중 매시는 탄광지역 여성들을 조직하고 모금하고 투쟁 소식지를 만들고 함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초선 의원 코빈은 자신의 의회 방청권을 파업 광부들에게 배부, 그들이 직접 보수당 의원들과 TV 카메라 앞에 설 수 있게 했다. 하원의원으로서 8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의사당 앞에서 벌인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를 벌여 남아공 경찰에 연행됐다가 풀려난 직후였다. 매시 역시, 차베스 집권기의 베네수엘라와 민주화 이후의 아르헨티나, 남아공 정부의 지역 개발 사업에 힘을 보탰다. 참여 지식인으로서의 매시의 삶은 좌파 정치인 코빈의 그것과 ‘공간ㆍ장소적으로’자주 겹쳤다. 2015년 11월 칼럼에서 매시는 코빈의 당수 당선을 축하하며 “하지만 그와 당이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처럼) 보수당의 모조품으로 퇴행한다면 노동당은 모든 진보적 동력의 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말년의 그는 런던 북부 킬번(Kilburn)의 이웃이자 동지인 좌파 사회학자 마이크 러스틴(Mike Rustin), 지난해 작고한 문화사회학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 등과 함께 신좌파 계간지 ‘Soundings’를 간행했고, 신자유주의 이후를 준비하는 일련의 사유들을 ‘킬번 선언(Kilburn Menifesto)’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마지막 인터뷰였던 소셜사이언스바이츠와의 대화에서 그는 2011년 10월~2012년 6월 런던 증권거래소와 성바오로 대성당 주변을 반세계화 구호와 텐트들로 점거했던 ‘Occupy London’시위를 언급하며 “그건 신자유주의의 자족적 질서를 향해 내민 가운뎃손가락(impertinent finger)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이 도시에 저질러놓은 일들, 즉 공적 공간의 사유화에 맞서 새로운 공적 공간을 열었다. (…)지나다니던 시민들은 매일 그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가서서 대화하고 질문도 하고, 미래 세계에 대한 논쟁도 벌였다.” 그는 장소의 역동적 실체와 새 질서의 가능성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웨인라이트는 부고에서 “우리는 지금 다른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의 죽음 이후 느꼈을 상실감에 젖어 있다”는 한 친구의 추도사를 인용했고, 좌파 노동운동 싱크탱크 ‘CLASS(Centre for Labour Studies)’는 “도린과 함께 있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와 더불어 있는지 쉽사리 잊곤 했다”고 썼다.

축구 광팬이었던 그는 리버풀FC 경기를 찾아 다니며 응원했고, 일부러 짬을 내 ‘버드 워칭(새 관찰)’을 즐겼다고 한다. 그라운드와 호수에서도 그가 공간ㆍ권력의 은유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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