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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영어 뒤섞인 공문서, 이해하라고 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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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영어 뒤섞인 공문서, 이해하라고 쓴건가

입력
2015.10.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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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

국어기본법 어기는 사례 빈발

국방부 문서 최다… 검찰청이 최소

40대 대기업 보도자료는 영어 범벅

"국민과 소통 수단서 신뢰 잃어"

“일자리 정책 뒷받침 Spot Survey(※긴급 여론조사) 형태로” “對中 교역 거점항으로서의” “기존과 다른 방식의 Plumbing Free(※배관 없는) 디스펜서”

한글과 로마자, 한자가 뒤섞여 뜻도 잘 알 수 없는 이 용어들은 정부 부처나 국내 대기업이 발표한 공식 문서에 등장했던 표현이다. 정부는 매년 한글날(10월 9일)이 돌아올 즈음이면 올바른 한글 사용을 독려하고 각종 정책 과제를 내놓고 있지만 정작 부처 정책ㆍ업무보고서에서조차 국어기본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빈번한 실정이다.

유명무실한 국어기본법… 한글 오남용 심각

7일 시민단체 한글사용성평가위원회가 지난해 정부 부처ㆍ청ㆍ위원회 등 정부기관 44곳의 주요 문서를 수집해 조사한 ‘공공문서 사용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방부와 해양수산부 등 전체 조사대상의 절반에 가까운 21개 기관의 문서에서 1,000어절(띄어쓰기 단위)당 10어절 이상의 외국어표기 위반 사례가 발견됐다. 국방부가 52.25어절로 최다를 기록했고, 가장 적게 집계된 검찰청은 1.24어절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자 오남용 사례를 보면 “조사관 사건 케이스 Study 운영”(인권위) “피해 30%↓ 더 많이 - Superior - 구조율”(옛 해양경찰청) “외과 정형외과 등 협진으로 one-stop 재활치료”(국가보훈처) 등 우리말로 쓸 수 있는 용어를 두고 로마자를 차용해 의미 파악을 어렵게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그대로 적시한 표기법도 적지 않았다. “旣 완료과제에 대해서는”(금융위원회) “미래 일자리 창출을 위해 現 근로시간 임금체계 개선”(고용노동부) “국제금융시장 불안이 對北관계 긴장 등 지정학적”(금융위원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정부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現(현)’ ‘旣(기)’ ‘新(신)’등의 한자는 ‘현재’ ‘이미’ ‘새로운’으로 표기하면 문제가 없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2013년부터 시행된 국어기본법은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문 용어나 신조어에 한해 괄호를 통해 한자 및 외래어를 병기하도록 제한을 뒀음에도 정부 기관들은 여전히 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포맷 수출 합의”(방송통신위) “워크숍 개최를 통해 정부 가이드라인 준수”(교육부) 등 사례처럼 특정 영어 표현의 사용 빈도 역시 높았다. 국립국어원은 해당 용어를 ‘양식’(포맷)’ ‘교육 또는 공동연수(워크숍)’ ‘방침 또는 지침(가이드라인)’으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관료 사회에서는 순화어보다 영문이나 한자 표기가 더 익숙한 데다 권고사항을 위반해도 제재를 받지 않아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들풀 한글사용성평가위원회 연구실장은 “정부 문서는 국민과 소통하기 위한 일종의 창구인데 외래어를 남용하게 되면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보도자료도 외계어 투성이

국내 40대 대기업이 올해 발표한 보도자료에서도 “마스카라 등을 할인하는 After Vacance Sale”(LG) “대주단으로부터 조달한 브릿지대출”(대성) 등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용어가 혼재돼 있었다. 또 “새로운 디자인에 완벽한 그립감”(삼성) “채용을 위한 블라인드 면접과 심층 면접”(효성)처럼 뜻을 알기 어려운 혼합어의 사용 역시 많았다. ‘사양(품목)’ ‘스시(초밥)’ ‘곤약(구약나물)’ 등 일본어투 용어를 자료에 차용한 곳도 눈에 띄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돼 있으나 국립국어원이 순화용어로 대체할 것으로 권고하는 단어들이다.

이대로 한글사용성평가위원회 위원장은 “현재 중앙행정기관마다 국어책임관을 두고 있으나 각종 자료에서 외래어를 걸러내고 어문 규정에 맞게 고치는 업무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며 “대기업들도 전 국민이 고객이라는 점에서 올바른 국어문화를 세우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서울 광화문광장 앞 세종대왕 동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광화문광장 앞 세종대왕 동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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