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기술없이 손쉽게 투여
회복시간 빨라 환자도 선호
99%가 비전문의에 의해 시행
의료사고 잇따라 '안전 사각지대'
수술시간 따라 용량 조절 등
가이드라인 빨리 만들어야
마취는 환자 치료에서 A이자 Z이다. 치명적인 암세포 제거에서 미인 만들기를 위한 얼굴성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수술은 마취로 시작해 마취로 끝난다. 마취가 치료의 기본임에도 관리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끊이지 않는 의료사고가 이를 말하고 있다. 우리 의료계의 구멍 뚫린 마취 관리 실태를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마취이야기’ 시리즈로 들여다 본다.
프로포폴 안전성 논란에도 무대책 일관
지방흡입 등 성형수술 시 마취제로 사용되는 프로포폴의 안전성에 적신호가 켜진지 오래지만 대책 없이 방치되고 있다. 대한마취통증의학회가 2009년 7월부터 2014년 6월까지 국내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총 105건의 마취 관련 의료분쟁을 자문한 결과에 따르면 프로포폴로 인한 수면마취(진정) 사고가 35건으로, 총 50건을 기록한 전신마취와 큰 차이가 없었다.
프로포폴로 인한 의료사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과다 사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방흡입 시술.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받고 있는 이 시술은 사실 매우 위험한 수술에 속한다. 팔 복부 엉덩이 허벅지 등 부분 흡입에만 2~3시간이 걸리고, 전신흡입의 경우에는 5~6시간으로 늘어난다. 마취전문의들은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의료진은 프로포폴 용량을 늘려 깊은 진정상태를 유도하는데, 이는 기도폐쇄 등 뜻하지 않은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윤준로 부천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기도 삽관 없이 수술과정에서 프로포폴을 주사하면 혀가 뒤로 밀려 기도를 막으면서 기도폐쇄 또는 호흡부전으로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홍성진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적게는 500cc, 많게는 4,000cc의 지방을 장시간에 걸쳐 몸 밖으로 빼내는 것이 간단한 수술일 수 없다”며 “신체적으로 건강한 20~30대가 주 고객이기 때문에 수술 건수에 비해 의료사고가 적을 뿐”이라고 했다. 홍 교수는 “성형외과, 피부과 환자 중 상당수가 다이어트를 병행해 저혈량 상태일 수 있는데 프로포폴로 수면마취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무호흡이 유발되기 때문에 많은 양이 주사되면 환자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고 했다.
투여의 간편함 때문에 선호 경향
프로포폴이 환자를 사지(死地)로 내몰 수 있는 데 왜 자주 쓰이는 것일까. 마취통증의학 전문의들에 따르면 의료진이 프로포폴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투여의 간편함 때문이다. 전신마취처럼 축적된 경험과 기술 없이도 정맥주사로 손쉽게 투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마취제들과 달리 환자들이 깊은 수면에 들어 시술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의사들에게는 이점이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데 1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기존 마취제와 달리 10~15분 정도에 환자가 마취에서 회복, 퇴원이 가능해 수술실 회전율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들 스스로 원하는 경우도 있다. 강남의 한 성형외과 원장은 “지인이나 인터넷을 통해 마취로부터 회복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알고 오기 때문에 프로포폴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프로포폴을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들은 “비(非)마취전문의들이 서슴없이 프로포폴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들이 수술 시 환자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면서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막상 수술에 집중하다 보면 환자상태를 점검하기 힘들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마취통증의학회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정맥마취 의료사고 관련 자문의뢰를 실시한 총 39건 중 36건(92.3%)이 환자의 치료와 진단을 담당하는 의사가 직접 수면마취제를 주사한 경우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마취수술에 대한 일반인 경각심 낮아
마취통증의학회의 ‘2011~2013년 의료기관 종별 전신마취 현황’ 분석자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마취전문의가 상주하지 않은 의료기관에서 프로포폴 등 정맥마취가 시행된 건수는 전체 19만9,348건의 47.2%인 9만4,083건. 이중 9만3,864건(99.8%)이 비전문의에 의해 시행됐다.
허울뿐인 마취전문의 전속제도도 문제다. 마취전문의들은 “특정 병원의 전속 전문의로 이름을 내걸고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시술하는 이들도 적지않다”며 “건강심사평가원에 마취 관련 급여를 청구한 병원자료를 조사하면 이들 행적이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외모중시 풍조에 밀려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을 우습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재준 한림대춘천성심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마취에 대한 사람들의 경각심이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한두 시간 잠자고 나면 원하는 몸매와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서울 강남의 한 유명 성형외과 관계자는 “환자들은 지방흡입 시술 시 가격대비 얼마나 많은 지방이 제거됐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꼬집었다.
프로포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마취전문의들은 ▦진정기록지 작성 의무화 ▦수술시간에 따른 투여 용량조절 ▦정맥 전신마취 급여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윤준로 교수는 “수술시간에 따른 용량조절 등 프로포폴 사용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홍성진 교수는 “정맥 전신마취 시술을 급여화 해 마취전문의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면 프로포폴과 관련된 의료사고가 현저히 감소할 것”이라며 “수술 뒤에 가려진 마취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k.co.kr
'우유주사'
친근한 별칭 뒤엔 섬뜩한 사망 사고
프로포폴은 2011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해 관리해 올 만큼 위험도가 높은 마취제다. 그럼에도 프로포폴 마취는 대중에게 비교적 안전한 시술로 잘못 알려져 있다. ‘우유주사’라는 별칭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일보가 최근 입수한 대한마취통증의학회의 ‘비마취의에 의한 프로포폴 관련 자문의뢰 건’자료를 들여다 보면 프로포폴의 섬뜩한 실체가 드러난다.
# 국소마취를 통해 손목골절 정복수술 중 환자가 통증을 호소. 정형외과 의사가 프로포폴을 주사한 후 환자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쇼크가 발생해 상급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사망(충북 영동경찰서 수사과)
# 프로포폴 진정마취 후 턱과 볼의 지방흡입 및 이물질 제거술 시행. 하지만 이후 의식회복 실패 및 호흡부전. 기관 내 삽관을 시도했지만 끝내 사망(서울 중앙지방경찰청)
# 46세 여성 환자에게 프로포폴 수면마취 하 복부지방흡입술과 피부절제술을 시행하고 수술포 걷은 후 청색증 발견. 심폐소생술 시행하면서 상급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사망(경기도 일산경찰서 형사과)
# 산부인과 의원에서 이틀 연속으로 프로포폴 수면마취 하 지방흡입술. 시술 5분 뒤 회복실에서 청색증 발생해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사망(서울중앙지방검찰청)
# 21세 여성 환자에게 양쪽 허벅지 및 둔부 지방흡입술 시행 위해 프로포폴 1,500mg 투여 뒤 3시간가량 시술. 그러나 환자 깨어나지 않았고, 다음날 새벽 5시께 사망(수원중부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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