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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못내 불편한 마음

입력
2017.08.1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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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그렇듯 책에도 유행이 있다. 판타지나 자기계발, 역사물처럼 특정 분야 책이 대중의 요구를 견인하며 베스트셀러로 오르는 게 대표적이다. 여기에 일반인은 잘 알아채지 못하는 트렌드 요인이 있으니 책의 외형이다. 요즘 서점가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판형이 문고판 페이퍼백이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에 짧은 분량, 1만 원 내외 가격을 매긴 책을 출판사들이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중장년층에는 삼중당문고의 추억을, 20~30대에게는 경쾌한 호흡을 어필하며 새롭게 부활하는 모양새다.

흔히 펭귄북스 창업자 앨런 레인이 페이퍼백 형태 문고본을 처음 선보인 사람이라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고급양장본이 주류이던 유럽에서 페이퍼백 책의 역사는 16세기 베네치아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후 페이퍼백 문고본은 숱하게 시도됐지만 ‘싸고 좋은’ 것을 찾는 소비자의 요구에 미치지 못해 번번이 좌절했다. 그 빈자리를 뚝심 있게 파고들어 출판 대중화라는 혁명을 이끌어낸 주인공이 앨런 레인이다.

앨런 레인의 본래 성은 윌리엄스였다. 삼촌 존 레인이 운영하는 출판사 보들리 헤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성까지 갈았다고 하니, 어지간히 출판사가 탐났던가 보다. 1925년 삼촌이 죽은 후 초짜 사장으로 취임한 레인은 뭔가 새로운 걸로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어느 날 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 기차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레인이, 역 도서가판대 앞에 선 두 젊은이의 대화를 엿들었다. 책을 읽고 싶은데 막상 찾아보면 값싼 책은 죄다 쓰레기 같은 내용뿐이라는 원성이었다.

이거다, 싶었던 레인은 당장 싸고 읽을 만한 새 시리즈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보들리 헤드 경영진은 기존 양장본의 10%에도 못 미치는 6페니짜리 책을 만들어내겠다는 위험천만한 신사업에 자금을 대지 않기로 했다. 주변 출판업자들도 비웃었다. 무엇보다 레프트북클럽을 이끌며 블루칼라 독서운동에 앞장서던 동료 출판인 빅터 골란츠의 비협조는 레인을 뼈아프게 했다. 골란츠의 속내야 알 길 없지만 펭귄의 저가 도서가 시장을 교란한다는 이유로 그는 훗날까지 레인의 업적을 평가절하 했다고 알려진다.

레인은 형제에게서 돈을 빌리고 작가들을 설득해 시리즈 열 권을 만들어냈으나 이번에는 도서판매상들이 들고 일어났다. 마진이 적은 펭귄 시리즈를 받지 않기로 입을 맞춘 것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레인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울워스’ 본사였다. 값싼 생활용품을 파는 슈퍼마켓 체인 울워스의 구매책임자 클리포드 프레스콧은 레인이 내민 낯선 책을 보고 단칼에 거절했다. 한데 마침 남편과 점심을 먹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오다 이 광경을 목격한 프레스콧의 아내가 시험 삼아 책을 진열해보라며 사업적 감각을 발휘했다.

달리 전하기로는, 프레스콧의 아내가 앨런 레인의 진중하고 귀티 나는 외모에 반해 도움을 줬을 뿐이라는 쑥덕거림도 만만치 않았단다. 어쨌거나 그 덕에 펭귄 시리즈는 극적으로 회생했고 첫 4개월 만에 무려 100만 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유사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6페니 투칸’ ‘6페니 크라임클럽’… 독자들은 획기적으로 변한 출판 환경에 열렬히 반응했고 이 흐름은 의무교육 확산과 맞물리며 전 세계로 번졌다. 바야흐로 우리가 아는 대중출판의 시대가 만개한 것이다.

작가 마거릿 윌리스가 ‘불꽃놀이라도 하듯’ 시대의 흐름을 완벽하게 포착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한 레인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생각이 많아진다. 무섭게 몰아치는 변화의 파고를 우리는 제대로 넘고 있는 걸까. 혹시 말만 무성할 뿐 오래된 관습에 묶여 허방만 디디던 그때의 대다수가 바로 내 모습은 아닐까. 그 인식이 자꾸 나를 불편하게 한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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