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층 높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
당시 상황 지켜본 생생한 목격자
지난달 130개 탄흔 새로 발견
총탄자국 각도 수평에 가깝고
38년 전 주변에 고층 빌딩 없어
기총소사 여부 밝혀 줄 단서로
이달 10일 국과수 분석 결과 나와
市, 리모델링 접고 원형 보존키로
광주 금남로.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군홧발을, 그리고 그들의 총칼에 무참히 쓰러진 시민들의 피를 오롯이 받아냈던 곳이다. 지금이야 “금남로는 민주화의 발판이었다”는 평가까지 받지만, 그땐 ‘죽음의 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곳에 가면 5ㆍ18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실제 5ㆍ18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 길이 2.3㎞, 폭 30~40m의 금남로 주변엔 그 날의 상흔을 간직한 건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5ㆍ18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희생자들을 안치했던 상무관, 5ㆍ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변신한 옛 가톨릭회관, 광주YMCA에 이르기까지 5ㆍ18사적지에 들어섰음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곳이 금남로다.
이 건물들 모두 그냥 무심코 지나치면 그저 그런 건물이려니 하기 십상이다. 금남로 1가, 그 중에서도 1번지인 전일빌딩도 그렇다. 언뜻 보면 그리 유별날 것도 없는, 후줄근하기까지 한 10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그러나 36년 전 그 날의 참상을 생생하게 지켜본 ‘목격자’이자 ‘증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1968년 12월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지어진 전일빌딩은 이후 4차례 걸쳐 10층으로 증축됐고, 빌딩 옥상은 5ㆍ18 당시 시민군이 계엄군의 광주 진압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쟁했던 공간으로 쓰였다. 시민들은 계엄군을 피해 몸을 숨기는 은신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광주시민들이 전일빌딩을 옛 전남도청과 함께 ‘5ㆍ18항쟁의 상징 건물’로 부르며,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다.
그런 전일빌딩이 최근 쓰리디 쓰린 상처를 드러냈다. 지난달 13일 5ㆍ18 당시 계엄군이 쏜 것으로 추정되는 총탄 흔적 150여 개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현재 건물 앞부분이 58~185㎜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시민들은 “36년 전 총을 맞고 서서히 쓰러졌던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전일빌딩은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 건물이다.
총상을 입은 전일빌딩은 어찌된 일인지 외상보다 내상이 더 컸다. 지난해 9월부터 세 차례에 걸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현장 조사 결과, 옛 전남도청 자리인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을 바라보는 빌딩의 측면에선 총탄 흔적이 20여개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 5월 당시 전일방송 영상 데이터베이스(DB) 사업부가 사용하던 10층 내부에서만 기둥(53개)과 천장(30개), 바닥(50여개) 등에서 130여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됐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동안 목격담으로만 떠돌던 ‘1980년 5월 계엄군 헬기 사격’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국과수는 총탄 자국의 각도가 수평에 가깝고 당시 전일빌딩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헬기 사격에 무게를 뒀다.
국내 총탄 분석의 권위자인 김동환 국과수 총기연구실장은 “5ㆍ18때 전일빌딩보다 높은 고층 건물이 금남로에 없었다면 헬기에서 쏜 게 유력하다”며 “탄흔이 만들어진 방향을 보면 옛 전남도청 쪽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돌면서 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을 난사하는 ‘기총소사’여부에 대해선 “불확실하다”고 했다. 다만, 탄흔의 크기로 봐선 구경 7.62㎜짜리 기관총 실탄이 아닌 5.56㎜ M16 소총 실탄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내놨다.
국과수의 이 같은 분석은 당시 목격자의 증언 덕분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고 조비오 신부는 1989년 2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80년 5월 21일 낮 12시 반부터 오후 2시 사이로 기억된다. 내가 광주상황에 대해 시내 몇몇 사제들과 대책을 논의하고 남동성당 문을 나서는데 전남도청 쪽에서 광주공원 쪽으로 가던 헬기에서 마구잡이로 기총소사를 했다”고 증언했다. 5ㆍ18 당시 광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아놀드 피터슨 목사도 1995년 증언록에서 “5월 21일 오후 3시30분쯤 계엄군 헬리콥터 3~4대가 시민에게 총을 난사해 그날 하루 광주기독병원에서만도 사망자 14명과 부상자 100여명이 목격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은 당시 군 당국이 헬기사격을 부인하면서 묻히고 말았다. 5ㆍ18 당시 계엄군이 헬기 사격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담긴 군 보고서(광주 소요사태 분석 교훈집)는 있었지만 실제 헬기 사격을 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는 터였다. 국과수는 이달 10일쯤 전일빌딩 총탄 흔적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를 광주시에 통보할 계획이다.
5ㆍ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기정사실화하면서 광주시와 5ㆍ18단체들은 전일빌딩의 ‘알려지지 않은 상처’를 통해 ‘지워질 뻔한 역사’를 기록하려 하고 있다. 전일빌딩 총탄 흔적 보존사업이다. 시 관계자는 “5ㆍ18 이후 줄곧 공실로 남아 있던 10층에 감추어진 총탄 자국은 80년 5월이 남긴 통곡이자,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라며 사업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지만 ‘10층의 상처’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자칫 도심 개발(철거)의 미명 아래 꿰매질 뻔했다. 지난해 8월 시는 전일빌딩을 복합문화센터 및 관광자원화 시설로 조성키로 하고 빌딩 리모델링(총 사업비 420억원) 설계작업을 추진했다. 노후화한 전일빌딩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 인근 문화전당과 도심과의 연계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앞서 2011년 광주도시공사는 소유주의 부도로 경매에 나온 전일빌딩을 138억원에 매입했다.
하지만 “전일빌딩 외곽에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 안에서도 탄흔을 본 것 같다”는 5월 단체와 목격자 진술이 나오면서 시가 국과수에 조사를 의뢰했다.
시는 당장 탄흔 보존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 이달 중 가동키로 했다. 전일빌딩 리모델링 자문위원회도 원형 보존을 기본 방침으로 세웠다. 페인트칠로 탄흔이 지워진 옛 전남도청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외벽 전체도 현재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당초 빌딩 가장자리 주기둥을 이용해 국내 최대 규모의 촛불 조형물을 만들려던 계획을 접은 것이다.
시민들도 전일빌딩 보존과 헬기 사격에 대한 진실 찾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김모(62)씨가 5ㆍ18 당시 전일빌딩 건물에서 주워 보관해 오던 총알 1개와 탄피 8개를 5ㆍ18기념재단에 기증했다. 5ㆍ18민주화운동기록관도 거들었다. 기록관 측은 총탄 구멍이 난 옛 광주은행 본점 건물 유리창 3개를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하기로 했다. 계엄군의 헬기 사격 입증을 염두에 둔 것이다. 5ㆍ18 당시 광주은행 본점은 8층 규모로 금남로 3가에 있었는데, 문제의 총탄 흔적이 남은 유리창은 8층에 달려 있었다.
군 당국은 여전히 ‘헬기 사격은 없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전일빌딩이 말해주듯이, “헬기에서 쐈을 것”이라는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5일 전일빌딩 앞에서 만난 김영국(59ㆍ자영업)씨는 “그 날의 아픔을 간직한 전일빌딩이 36년 만에 잊혀졌던 진실을 말하고 있다”며 “전쟁 때나 있을 법한 헬기 사격이 사실이라면 이는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전일빌딩과 금남로, 그 곳에선 그 날의 진실을 향한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광주=글ㆍ사진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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