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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아빠와 했던 캐치볼, 쳇바퀴 인생의 아득한 추억

입력
2016.05.0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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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면 뜰은 타자인 형과 투수인 나, 감독인 아버지가 캐치볼 열전을 펼치는 야구장이 된다.
일요일이면 뜰은 타자인 형과 투수인 나, 감독인 아버지가 캐치볼 열전을 펼치는 야구장이 된다.

유준재 글, 그림

문학동네 발행ㆍ52쪽ㆍ1만2,800원

이른 아침이나 늦저녁에 나무들한테 말 걸며 느릿느릿 동네 한 바퀴 돌곤 하던 것이 아득한 일이 되었다. 종종걸음으로 쓰레기 분리수거장에나 다녀오는 길에 마주치는 낯선 이웃들도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것 같진 않다. 어딘가로 급히 가는 이, 어딘가에서 급히 돌아오는 이, 휴대폰 통화를 하느라 걷는 둥 마는 둥 하는 이….

1980년대 배경의 그림책 ‘마이볼’의 보통 시민 ‘아버지’도 그렇게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계 추 같은 나날을 반복한다. 막내인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일찌감치 일어나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기다려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실패한다. 쉬는 날에도 집안의 고장 난 라디오며 깨어진 화분이며 담장을 손보느라 바쁜 이 과묵한 아버지가 곁을 내어주며 조근조근 말씀이 많아지는 때는 야구 중계 시간이다.

아, 아버지는 중매로 만난 어머니와 동대문야구장에서 세 번 데이트하고 결혼한 야구광이었다. 어느 날, 그럴 만한 때가 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유명 브랜드 글러브와 배트를 사 들고 온다. 이제 일요일이면 집의 작은 뜰은 타자인 형과 투수인 나와, 포수 겸 감독인 아버지가 캐치볼 열전을 펼치는 야구장이 된다. 힘껏 던지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편 글러브를 보고 정확하게 던질 것, 두 손으로 책임지고 잡을 것, 겁먹지 말고 눈을 크게 뜬 채 공을 끝까지 볼 것…. 한바탕 뛰고 난 세 부자는 동네 목욕탕 행이다. ‘아버지는 등을 밀어주고, 머리를 털어주고, 바나나우유를 사’준다. 야구광 아버지의 전성시대는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 활짝 꽃핀다.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형과 아버지를 과감히 배반하고서, 빨강 줄무늬 야구모자와 유니폼에 매혹된 나는 오비 베어스를 응원한다. 집과 회사를 시계 추처럼 오가던 아버지가 형제를 야구장에 데려간 결전의 그 날, 베어스가 만루 홈런을 친다.

내레이터 ‘나’는 고스란히 이 그림책을 쓰고 그린 유준재 작가이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채 묵묵한 부성을 되새기는 이 그림책 작업의 기나긴 시간 끄트머리에서 아버지를 떠나 보냈다. 실크스크린과 판화 작업의 풋풋하고도 담담한 그림은 캐치볼을 추억하며 떠올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심오한 메타포로 길어 올리고, “아빠가 아주 높이 던질 테니까 한번 잡아 봐. 잡을 수 있겠으면 ‘마이볼’하고 크게 외쳐. 내가 잡겠다는 뜻이니까.” 그러면서 아버지가 던진 공이 마지막 페이지의 글러브에 떨어지기까지 펼친 세 장면으로 날아가는 과감한 연출은 삶의 잡다한 소음으로부터 아득히 우리를 들어올린다.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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