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힙합이 국내에 상륙한 지 20여 년 만에 주류 음악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대중화 과정에서 쌓아온 노력과 실력에 비해 저평가되는 MC(래퍼)들도 생겨나고 있다. 자이언티, 지코를 사랑하지만 주석, 피타입을 모르는 새내기 힙합팬을 위해 준비했다. 새로운 라임(운율)과 플로우(흐름)를 개발하며 힙합의 발전을 끌어간 MC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990년대 국내 음악계에는 PC통신을 통해 새 조류를 소개한 '힙합 문익점'들이 있었다. 지금 들으면 투박하게 느껴지는 이들의 음악은 이후 나온 차세대 힙합의 자양분이 됐다. 힙합이 마이너리티 음악에서 주류 음악으로 자리잡은 데는 무관심을 불사한 이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힙합 듀오 가리온(사진)도 불모지에서 싹을 틔우듯 음악을 시작했다. 흑인만의 음악이던 힙합에 한국 가사를 입히는 노력으로 한국 힙합 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2012년 Mnet '쇼미더머니'에서 현장 관객들에게 공연비 55만원을 획득하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명성에는 흠이 가지 않을 만큼, 힙합계에선 인정받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전설' 가리온
1997년 PC통신 하이텔에 흑인 음악 동호회 '블렉스'(Black Loud EXploders)가 개설됐다. 다양한 흑인 음악을 공유하는 온라인 모임이었던 블렉스는 그 해 '검은소리 vol.1'라는 힙합앨범을 발매하며 정체성을 찾아갔다. 장난스럽게 시작된 이 동호회는 앨범 발매 이후 공연과 앨범 제작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그룹으로 성장하며 언더그라운드 판을 조성했다.
MC메타 이재현은 블렉스의 대표 운영자였다. 1998년 그는 우연히 블렉스가 주로 활동하던 클럽 MP(Masterplan·힙합 공연을 열던 클럽)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선보이는 나찰을 발견했다. 메타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가리온이라는 팀을 꾸렸다.
그 해 '거짓', '그래서 함께하는 이유' 등 두 곡으로 데뷔한 이들은 여러 행사 무대를 거치며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선구자로 자리 잡았다. 프로듀서 제이유와 3인조로 개편한 뒤 2001년 정식 앨범 제작에 돌입해 4년 뒤에야 1집 '가리온'을 발매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등 대중적인 힙합가요와 달리 이들의 음악은 무거웠고 지극히 철학적이었다. 이 때문에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으나 힙합 팬들 사이에는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힙합의 교과서'로 남게 됐다. 제이유는 2집 '가리온2'가 발매되기 전 팀을 떠났다.
2010년 2인조로 2집 '가리온2'를 발매한 이들은 그 다음해 한국대중음악상 (KMA)에서 '올해의 음반', '최우수 힙합/음반', '최우수 힙합/노래'의 3관왕을 달성해 언더그라운드 힙합에 대한 가능성을 입증했다. 수상을 계기로 인지도를 높였지만, 오버그라운드에서 더 강한 인상을 남겼던 계기는 Mnet '쇼미더머니'를 통해서다. 시즌1 때는 가리온이 참가자로, 시즌2 때는 MC 메타가 프로듀서로 참여해 지난 명곡을 알리기도 했다.
음악 활동 20여 년 동안 정규앨범은 2장이 전부다. 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하지만, 가리온은 국내 힙합의 출발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활동으로 국내 힙합가수로는 드물게 '살아있는 전설'이라 칭송받는다. 이들은 지난 3월 싱글 앨범 '이야기'를, 5월 싱글 앨범 'Make My Day'를 발매했다. 올해 안에 정규 3집을 발매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유 있는 고집…한글 가사로 정체성 찾아
가리온은 영어를 거의 쓰지 않고 한글 가사를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YO' 'What's up'과 같은 가벼운 추임새도 활용하지 않는다. 모국어로 우리만의 정서를 살리면서 매끄러운 플로우(흐름)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가리온은 한국 힙합 특유의 정서를 창조한 가수로도 꼽힌다.
미국 MC 투팍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음악을 듣고 자란 가리온은 정식 데뷔 전 둔탁하고 어두운 비트와 가사를 추구했다. 정규 1~2집을 거치면서 보다 대중성을 띠게 됐지만, 한글 가사로 특유의 플로우를 살리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이에 대해 MC메타는 2012년 Mnet '쇼미더머니' 비어파티에서 "한글 가사로 랩을 하면 대중이 이해하기도 쉽고 가리온 음악의 감성에도 잘 맞는다"며 "계속 하다 보니 한글 특유의 맛을 낼 수 있는 요소가 느껴지더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고 가리온이 고정적인 레퍼토리만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1세대 래퍼인 이들이 도태되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재즈 힙합, 사투리 랩 등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이어간 부분이 크다. 지난 5월 발매한 콜라보레이션 곡 'Make My Day'에는 록밴드 해리빅버튼과 함께 언더그라운드의 하드 록과 힙합 장르를 결합한 시도를 선보이기도 했다.
●정규 2집 '영순위'
●2005년 싱글 '무투'
●2005년 싱글 '소문의 거리'
●정규 1집 '옛 이야기'
●2016년 싱글 'Heritage'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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