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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집은 기억이다

입력
2016.04.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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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누구에게는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지만 건축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건축의 계절’이다. 건축주들은 땅이 풀리고 바람이 좋은 시절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어서 집을 짓자고 독촉 또 독촉이다. 개구리만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겨울 동안 도면으로 존재하던 ‘집’도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 이 봄날, 꽃과 나무를 보러 산으로 들로 나가는 사람들과 반대로, 건축인들은 흙먼지 날리는 건축현장을 찾아 산으로 들로 나간다.

몇 년 전부터 주택 설계 의뢰가 많아졌다. 특히 30,40대의 젊은 부부들이 자주 찾아왔다. 터무니없이 올려달라는 전세금에 충격을 받아 좀 떨어진 곳이라도 좋으니 땅을 사서 내 집을 짓겠다고도 하고,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둘러본 끝에 찾아낸 작고 오래된 단층 주택을 자신의 삶에 맞게 고쳐보겠다고도 한다. 여전히 평수 넓은 신형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 땅에서 젊은 세대로 갈수록 주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요즘이다.

하지만 상담을 시작하면 질문은 늘 같은 곳에서 시작하고 계속 맴돈다. “몇 평이에요? 최대한 평수를 확보해 주세요. 더 크게 더 넓게!” 경험해본 공간이 아파트뿐인 건축주들에게 내부공간은 무조건 커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야 아파트 대신 주택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듯. 건축가는 반론을 펼친다. “하지만 이건 주택입니다. 마당이 있잖아요. 마당이 얼마나 좋은데요. 평수를 좀 줄이더라도 예쁜 마당을 잘 꾸며보면 어떨까요.” 건축주의 표정은 의아해진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작은 집은 이야기가 점점 풍성해진다. 단 하나뿐인 건축주만을 위한 집.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평면도 잘 빠졌고 공간도 제법 괜찮다. 두 사람이 모두 흡족한 미소를 짓는 순간, 반전은 시작된다.

“건물이 좀 독특하지 않나요. 최대한 공간을 찾아 먹으라고 친구들이 그러던데… 다시 팔 때를 생각해야죠.” 건축가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가족의 밝은 미래를 담은 집을 꿈꾸면서도 먼먼 미래에 이 집을 사게 될 지도 모를 사람까지 고려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 ‘되판다’는 상품성이 강조되면서, 무한 도돌이표처럼 ‘방의 크기’ 문제로 되돌아간다. 건축주가 새로 구상한 공간은 아파트 평면을 그대로 닮았다. 최대한 크고 단순하다. 우리 세포 속에 언제부터 아파트 DNA가 들어있었던가. 도면을 고치는 건 쉽다. 선을 하나 바꾸고 면을 조금 늘이면 된다. 하지만 반짝이던 아이디어와 매력적인 특성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어느새 어디서 본 듯한 평범한 집으로 바뀌어있다.

여기서 끝나면 맥 빠진 호러 영화가 될 터이니, 건축가는 도면을 고치지 않고 단호하게 나가기로 한다. 완성된 집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건축주 가족을 생각하며 아파트에서 접하지 못하는 공간들이 왜 필요한지를 설파한다. 마당 같은 외부 공간과 정형화되지 않은 공간이 삶을 얼마나 다채롭게 해주는지를. 공간에 얽힌 아름다운 기억 하나 갖는 것이 건축가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 동안 내가 집에서 경험한 것들 중에 마당의 기억만큼 다채롭고 생생한 것은 없다. 마당에 드리워진 그림자랑 놀고, 작은 연못을 파고 분수를 만들던 기억,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토록 달라지는 마당에서 낙엽을 쓸던 기억들…. 그때 그 낡고 작은 주택은, 마당에서의 추억들이 너무 강렬해서 그 집에서 살았던 시절 전부를 대변하는 것 같다.

집은 평수가 아니라 멋진 기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집이 삶의 질을 높이고 풍부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흥분되고 신나고 뭔가를 더 하고 싶은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집과 더 밀착되는 경험들, 차곡차곡 쌓인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집의 진정한 가치다. 그것이 집의 재산가치보다 앞서야 할 삶의 가치다.

정구원 트임건축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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