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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광장의 열기가 식고 나면

입력
2016.11.2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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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2일 광화문광장에서 가득 메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홍인기기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2일 광화문광장에서 가득 메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홍인기기자

1987년 12월은 몹시 추웠다고 기억된다. 객관적 기온과 상관없이. 그래도 붐비는 버스나 지하철 옆에 선 낯선 사람과 몸이 닿는 게 정말 싫었다는 기억도 또렷하다. ‘이 사람도 혹시 1번 찍은 사람이 아닐까. 대선 결과를 어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까.’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 해 6월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이 바로 이들일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지금 그때 느낌이 되살아난다. 토요일마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우는 시민들을 보면서, 그들이 외치는 바람이 그대로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을까 불안해진다. 지금은 끓어 오르는 공분으로 하나가 됐지만, 마음 속 해결 방안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생각했던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의 가능성이 가물가물해진 지금 탄핵이 유력한 대안으로 추진되고 있다. 탄핵이 실현되기까지 적지 않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게다가 탄핵이 결정되기까지 고비보다 탄핵 이후 더 까다로운 선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차기 대선과 개헌의 선후문제, 개헌한다면 정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 하나같이 의견 일치가 어려운 선택이다. 지금은 규탄 대상인 세력들이 분명 그런 틈을 파고들며 우리를 다시 구질서로 되돌리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 이념과 선거 구도가 ‘기울어진 경기장’이라 불평하는 야당 정치인이 적지 않다. 국민의 평균적 이념 성향이 보수에 치우쳐 있어 진보 성향 정당은 상대방의 결정적 잘못이 더해져야만 겨우 승리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보수 정당은 스스로 무너지지만 않으면 쉽게 선거에서 이긴다. 그런데 이런 기울어진 경기장 문제는 우리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얼마 전 대선을 치른 미국을 비롯해 일본 영국 등 다수 서구 선진국 사람들의 평균적 이념적 성향은 보수에 편향돼 있다.

그 근저에는 진보의 논리보다 보수 논리가 이해하고 신뢰하기 쉽다는 차이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보수가 지키려는 가치는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을 설득하기 쉽다. 반면 진보의 가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기 때문에 이해시키기도 동의를 끌어내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보수가 얼마나 손쉽게 진보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가는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연구한 세계적 경제학자 앨버트 O. 허시먼이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통해 3가지 명제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첫째, 그래 봐야 너만 힘들다(역효과 명제). 둘째, 백날 해봐라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무용 명제). 셋째, 복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다(위험 명제). 이상의 세 명제는 허시먼의 명제를 경제학자 우석훈이 한국 상황에 맞춰 손본 것이다.

‘산업화 세력’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이 세 가지 명제를 자신들의 위기나 선거 때마다 꺼내 든다. 광화문광장에 집결한 분노의 함성에 대해서는 무용 명제를 응용해 사기를 꺾으려 할 것이다. 탄핵으로 인한 국정 공백이나 개헌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지면 여지없이 역효과 명제를 꺼내 들며 과거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이 셋 중에 가장 정교한 명제가 위험 명제다. 이는 수많은 시민의 노력으로 성취한 현재 민주화 체제를 자기들이 수호하려는 것처럼 가장하며, 진보를 위한 시도에 대해 자칫 현재까지 이룬 성과도 뒤로 돌리는 무모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소수 계층의 특권을 없애려는 시도는 자유를 억압하는 행동이라고 반대할 것이고,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의 확대는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1987년 이룬 민주화가 더 이상 후퇴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광장에 모인 우리는 이런 보수세력의 논리에 휘둘리면 안 된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자. 단기적으로 보면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100년, 200년을 놓고 보면 세상은 조금씩 진보해왔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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