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워싱턴포스트가 공개한 미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파일은 CNN 보도처럼 ‘트럼프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트럼프의 온갖 망언과 기행에도 꿋꿋이 그를 지지하던 공화당 지도부와 유권자들이 이를 계기로 등을 돌렸다.
트럼프는 공개 직후 사과했지만 ‘라커룸 대화였다’며 애써 발언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고 있다.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고 지금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벤 카슨은 CNN과 인터뷰에서 “그런 정감있는 농담은 항상 있었다”라며 트럼프를 방어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자랑스럽게 떠벌린 발언을 보면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위험한 내용들이다. 트럼프는 여성 전반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화 시킬 뿐만 아니라 특정 여성을 실제로 위협하고 성추행했다.
녹음파일에 함께 등장해 말을 주고 받은 빌리 부시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시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사촌으로, 대화가 녹음된 2005년 당시 미 연예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의 진행자였다. 트럼프는 이 프로그램에 카메오로 출연하기 위해 녹화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부시와 문제의 대화를 나눴다.
부시는 문제의 대화를 나누며 트럼프의 각종 성폭력 발언에 웃고 박수치며 적극 호응했다. 트럼프가 유부녀에게 추근댄 경험을 자랑하자 “진짜 대단한 뉴스”라며 감탄하기까지 했다. 트럼프가 “당신이 스타면 그들(미녀)은 무엇이든 하게 해 준다”고 주장하자 부시는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맞장구 쳤다. 여기 고무된 트럼프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언급하며 “XX를 움켜쥐고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시는 녹음파일 공개 후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사과하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그에게 올 여름부터 ‘투데이쇼’의 공동 진행을 맡겼던 NBC는 즉각 출연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일부 외신에서는 NBC가 부시를 퇴출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서도 예외없었던 유명인사들의 성폭력 발언
유명인들의 성폭력 발언은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유명인들의 크고 작은 성폭력 발언이 논란이 됐다. 이런 일들이 잦다 보니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는 ‘꿰매고 싶은 입’이라는 비판적인 상을 만들어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각계 주요 인사들의 여성 비하 발언을 매년 선정해 발표했다.
이 상을 6회 선정하는 동안 이명박 전 대통령은 두 번이나 1등인 재봉틀상을 받았다. 특히 그는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 예비 후보에서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 대선 후보로 선출되던 시기 두 차례나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2007년 MB, 충북도지사 ‘관기’ 발언에 맞장구 쳐 논란
첫 번째는 2007년 8월 3일 충북 청주에서 터졌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왔던이 전 대통령은 합동유세차 청주를 방문했다.
충북도지사였던 새누리당의 정우택 의원은 이 후보를 귀빈실에서 맞으며 “어제 밤 잘 보내셨냐. (이 후보가) 예전 관찰사였다면 관기(官妓, 고려ㆍ조선시대에 관청에 딸린 기생)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에 이 후보는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거 아니었냐?”고 농을 던져 동석자들이 함께 웃었다.
이에 대해 충북여성민우회 등 충북지역 여성단체들은 “성매매를 조장하는 성차별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단순 농담이나 실수가 아니라 평소 내재된 시대착오적 성의식의 표출”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한명숙 예비후보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민주노동당 등 야권 정치인들도 두 사람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당시 이명박 캠프는 “정 지사가 무례한 농담을 던지는 바람에 이 후보까지 곤란하게 됐다”며 정 의원에게 책임을 돌렸다. 충북도 관계자는 “그날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 지사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 발언인데 본의 아니게 확대됐다”며 “다른 뜻은 없었다”고 전했다. 9년 전 물의를 빚었던 정 의원은 지난 7일 대선을 위한 싱크탱크격인 연구소를 만들어 내년 대선 출마를 사실상 선언했다.
“덜 예쁜 여자가 서비스 더 좋아”는 ‘선배가 전한 인생의 지혜’?
이 후보의 두 번째 발언 파문은 ‘마사지걸 발언’이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 후보는 2007년 8월 28일 서울 시내 한 중국음식점에서 중앙일간지와 통신사 편집국장 등 약 10명과 저녁식사 도중 문제의 발언을 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폭탄주를 두세 잔 마신 이 후보는 현대건설 근무 시절 외국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 편집국장은 “이 후보가 현지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선배는 마사지걸들이 있는 곳을 가면 얼굴이 덜 예쁜 여자를 고른다더라”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얼굴이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남자들이… (일부 생략) 그러나 얼굴이 덜 예쁜 여자들은 서비스도 좋고… (일부 생략) 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상대했지만 예쁘지 않은 여성들은 선택해준 게 고마워 더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이 발언은 파장이 컸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은 이 후보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내 발언의 진위 여부와 사과를 요구했다. 이 후보 측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을 뿐”이라고 반박했다가 오히려 논란을 더 증폭시켰다. 청와대에서도 이 후보 발언에 대해 “그에 대한 지지나 선호 여부를 떠나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후보 측에서는 ‘관기 발언’처럼 농담으로 치부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현장에 있었던 나경원 의원은 “밥 먹으며 (농담으로) 한 얘기”라며 자신도“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후보 측 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후보는 발언이 논란이 된지 두 달이나 지난 2007년 11월 30일 KBS 여성정책 토론회에 참석해 그 문제를 직접 거론했다. 그러나 그는 마사지걸 발언을 끝내 사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발언이 새어 나간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그는 “45년 전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무작정 사과하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의 성 평등 의식도 많이 신장돼 예전처럼 공공연하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듣는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소수 의견일지라도 성 차별적 발언을 들어주고 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무언의 동조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부시가 단적인 사례다. 화자와 청자 모두의 의식 변화가 없으면 성 폭력 발언을 거침없이 털어놓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국민의 대표자로 나설 수도 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