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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주의 : 굳이 읽을 필요는 없는 글

입력
2016.04.2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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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방을 싸다가 ‘여행 가방’을 읽었다. 구 소련 출신의 ‘반체제 작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쓴 책이다. 우리가 아는 구 소련 작가들은 대개 반체제적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불필요한 수식어인가? 하지만 늘 필요한 말만 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도블라토프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망명을 결심한다.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관청을 찾아간 그는 황당한 소식을 듣는다. 내무부의 특별지시로 여행 가방을 세 개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짐들은 어떡하라고? 도블라토프는 항의하지만 소용없다. 실은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 막상 짐을 싸고 보니 가방 하나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18년 동안 경제 활동을 했는데 남은 것이라곤 고작 코딱지만 한 여행 가방 하나다. 그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고 그때를 회상하는데, 나라면 펑펑 울었을 게 분명하다.

도블라토프의 가방에는 핀란드 산 양말과 특권층 구두, 점잖은 더블버튼 양복과 장교용 벨트, 페르낭 레제의 잠바와 포플린 셔츠와 겨울 모자와 운전장갑이 들어 있었다. 라이언 빙햄이 보았다면 반색할 목록이다.

라이언 빙햄은 제이슨 라이트먼의 영화 ‘인 디 에어’에 등장하는 해고 전문가다.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불필요한 인력을 대신 해고해주는 일이다. 극중에서 그는 ‘당신의 가방엔 무엇이 있나’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는데, 한 마디로 우리 인생은 여행 가방과 같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피곤한 건 그 안에 불필요한 것들을 잔뜩 채워 넣기 때문이다. 소파, 침대, TV, 자동차, 아파트, 인간관계 등등. 그러니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말은 그럴듯하다. 세상엔 예쁘고 불필요한 물건이 너무 많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때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물건을 사는 건지 물건을 사기 위해 삶을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욕망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같은 제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말이 빙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문제다. 그렇잖아도 빙햄을 통해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들은 당분간 ‘가벼운 삶’을 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무거워지는 이유다. 그들 중 몇몇은 정말 가방 하나만 들고 거리를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가 ‘건강’해지는 동안 누군가의 삶은 버려지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참 자유롭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현실을 모른다는, 아니 알고도 모른 척 한다는 점에서 빙햄과 구 소련 체제는 서로 닮았다. 그들은 시스템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감춘다. 한쪽은 위선적인 방식으로, 다른 한쪽은 위악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최근 정부 여당은 노동개혁 4법의 입법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기업의 체질 개선을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고, 구조조정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상하다. 너무 이상해서 위선인지 위악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회사의 체질은 경영진의 책임일 텐데 왜 구조조정이 필요한지 알 수 없고, 구조조정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왜 가뜩이나 불안한 일자리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이 필요라면 불필요한 일만 하며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 내 생각이 짧은 탓이리라. 빙햄에게는 빙햄의 생각이, 정부 여당에는 정부 여당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세상을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 가방에 두 권의 책을 넣기로 했다. 지그문트 바우먼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과 우디 앨런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이 바로 그 책들이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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