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중에서)
밀이 이 말을 했던 게 150여년 전이다. 널리 이해하고 있는 대로 밀은 개인의 자유를 폭넓게 옹호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역시 가볍지 않다. 개인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이유로, 어느 선까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느냐를 둘러싸고 정답 없는 논쟁이 밀 이전에도 이후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고상해 보이는 이런 논쟁과 전혀 인연 없는, 누가 봐도 부당한 개인의 자유 침해가 도처에 수두룩하다. 정치권력이 조직과 정보를 활용해 선거에 개입하거나 언론을 통제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 방식은 IT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미국의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해마다 언론자유 보고서를 발표하는데, 거기서 언론자유의 정도에 따라 국가를 세 부류로 구분한다. 자유지수가 61위까지는 ‘언론 자유국’이고, 133위까지는 ‘부분적 자유국’, 나머지는 ‘언론자유가 없는 나라’다. 지난 4월 발표한 올해 보고서에서 한국은 ‘부분적 자유국’에 속했다. 벌써 5년째다.
개인의 자유란 왜 필요한 것이며, 어느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 걸까. 메시지는 제각각이지만 공히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칼럼 세 편을 담아봤다.
“김승환 교육감이 빼앗은 다른 기회가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착한 삼성 이미지’의 시너지 형성 기회다. 법인세 정산에서 비용 처리하며 개최하는 ‘삼성 드림 클래스’에 전북교육청이 공식 협조할 경우 삼성이 획득하리라 기대했던 바로 그것. 둘째는, 앞의 것보다 훨씬 중요한데, 학생 스스로 삼성 반도체에 입사하지 않겠다고 결정-선언할 기회다.
첫째 기회를 박탈한 김 교육감은 지극한 상식인이다. 그러나 둘째 기회를 빼앗은 김 교육감은 갈데없는 ‘꼰대’다. 파스칼의 ‘갈대’ 반대항에 있는 ‘꼰대’. ‘꼰대’는 흔들리지 않는,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믿는 존재다. 고정되고 완성된 ‘꼰대’는 가능성을 사유하지 못하며, 불확실성을 사랑하지 못한다. 파스칼의 이야기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것,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으스러뜨리는 데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그를 죽이는 데 한 줌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우주가 그를 으스러뜨린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를 살해한 그것보다 고귀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우주가 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지만, 우주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학생이 삼성에 취직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전국 17명의 교육감이 삼성에 취직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보다 아름답다. ‘삼성 공화국’이 아무리 무장하고 무정할지라도 으스러뜨릴 수 없는 존재는 반드시 있다.”(칼라밍 8월 20일 ‘삼성에 반대할 권리-김승환 교육감이 빼앗은 기회’▶전문 보기)
“경제도, 정치도, 사회적 실험도, 학문도 모든 창조는 우리에게 유용한 새로운 연결과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어야 가능하고, 또 과거의 연결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비판적 사고와 비판적 표현의 자유가 주어져야 가능하다. 사회가 경직되어 있고, 조직이 경직되어 있고, 보수적으로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창조라는 새로운 연결이 가능하지 않다. 지금의 한국은 더 이상 선진국의 것을 효율적으로 베끼기만 해서는 경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소위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선도적으로 창조하고, 세계적인 표준도 만들고, 우리에게 맞는 사회적 실험도 하여 우리가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한국을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부르지만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는 사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넓게 허용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였고, 지난 정부부터 한국의 역동성이 사라진 것은 단순히 우연이거나 세계경제의 침체 때문만이 아니다. 사고와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와 실험의 자유를 억압하고,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만 한 정부와 기득권의 정책이 역동성을 죽이고, 소수에게만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창조경제든 무엇이든 창조적인 것은 보수의 절대적인 가치인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유라는 면에서 아직 우리에게는 완전한 광복이 오지 않았다.”(경향신문 8월 21일자 정동칼럼 ‘‘창조’ 원한다면 자유를 허하라’▶전문 보기)
“예술로서 권위를 공격하는 시도들은 무슬림들 스스로도 이슬람 율법이나 체제를 겨냥해서 많이 하고 있다. 이는 최근 영화 ‘쿼바디스’처럼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소수자 인권헌장 거부에서처럼 이런 논란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만 샤를리 테러에 대해선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의 수많은 무슬림들이 단호하게 비난하고 있다. 샤를리가 만평을 게재할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의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는 무슬림들을 위해서라도 보호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의 저변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종교적 성역을 지키려는 자들이 종교가 더 인간 중심이 되길 바라는 자들에게 가한 응징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반대편의 폭력주의자들이 보복의 근거로 남용할 우려 때문에 “샤를리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 최대의 남용 사례가 바로 9ㆍ11을 빌미로 근거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부시나, 가자를 맹폭하고도 샤를리 시위에 참여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다. 하지만 이들을 제어할 동력 역시 내부에서 올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권력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자유는 더욱 필요하다. 그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불쾌할지라도.”(한겨레신문 1월 13일자 시론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표현의 자유’▶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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