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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에 담긴 광복, 그 환희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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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에 담긴 광복, 그 환희의 순간들

입력
2015.08.1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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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총독부 건물까지 거리행진을 하며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려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9일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총독부 건물까지 거리행진을 하며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려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태극기를 들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시민들, 인파의 환호를 받는 연합군, 일장기가 내려지는 조선총독부 건물 등 광복을 맞은 환희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들이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광복 70주년을 이틀 앞둔 13일 광복 당시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주요 순간을 생생하게 담은 희귀자료 70건을 공개했다. 사진들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해 전자사료관에 실어온 것들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면을 70건으로 추렸다.

1945년 9월 연합군의 행렬이 거대한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한 영국군이 트럭 아래로 내려 오려는 모습이 눈에 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연합군의 행렬이 거대한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한 영국군이 트럭 아래로 내려 오려는 모습이 눈에 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그토록 기다려온 해방’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이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연합군에 손을 들면서 한반도는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의 환희를 맛봤다. 끈질긴 항일 투쟁으로 이날을 염원해온 국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5년 9월 연합군이 상륙하자 시민들은 번화가 건물에 “한국은 연합군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와 연합국 국기를 내걸고 기쁨을 나눴다. 국토 곳곳의 게양대에서는 일장기가 내려왔고, 장교와 시민들은 이 모습을 뭉클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1945년 9월 10일 서울의 한 번화가 건물에 4개국 국기가 걸려있다. 밖으로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한국은 연합군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이 적혔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10일 서울의 한 번화가 건물에 4개국 국기가 걸려있다. 밖으로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한국은 연합군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이 적혔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9일 총독부 건물 마당에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9일 총독부 건물 마당에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떠나는 일본인들’

한편에서는 일본인들이 패전 소식을 품고 자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총독부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1944년까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은 약 71만 명”이라고 설명한다.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미군 통제 하에 무장해제된 뒤 본국으로 송환됐다. 군인 송환은 1945년 9월 26일부터 11월까지, 민간인 송환은 1945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때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은 송환대상자 1인당 소지 한도액은 민간인이 1,000엔, 군인이 500엔으로 제한됐다. 시계, 카메라 등도 가져갈 수 없었다.

1949년 말까지 한반도, 중국, 만주, 태국 등에서 본국으로 송환된 일본인은 약 600만 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들이 주로 마이즈루, 시모노세키, 하카타, 사세보 등 각 지역의 항구로 들어왔다”며 “일본은 이를 기념하는 귀환기념관(引揚記念館)을 설치하는 등 침략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 없이 귀국 과정에서의 고초와 희생만을 기린다”고 지적했다.

1945년 9월 21일 미7사단 소속 헌병대가 일본군의 무기를 수색하고 있다. 미군은 일본인들을 한국 남부 지방으로 이동시켜, 무장해제 시켰다. 일본인들은 소총, 총검, 포 등의 무기를 양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미7사단 소속 헌병대가 일본군의 무기를 수색하고 있다. 미군은 일본인들을 한국 남부 지방으로 이동시켜, 무장해제 시켰다. 일본인들은 소총, 총검, 포 등의 무기를 양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재한일본군이 미 제7보병사단에 양여하기 위해 손수레에 장비를 싣고 가고 있다. 일본군은 한국 남부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 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재한일본군이 미 제7보병사단에 양여하기 위해 손수레에 장비를 싣고 가고 있다. 일본군은 한국 남부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 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미군에게 양여하기 위해 손수레에 무기를 싣고 가는 일본군을 미군이 동행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미군에게 양여하기 위해 손수레에 무기를 싣고 가는 일본군을 미군이 동행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미 제7보병사단 소속 병사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여 획득한 총검을 쌓아놓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9월 21일 미 제7보병사단 소속 병사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여 획득한 총검을 쌓아놓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12일 차에서 짐을 내린 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다음 지역으로의 이동을 기다리는 일본 군인들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12일 차에서 짐을 내린 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다음 지역으로의 이동을 기다리는 일본 군인들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1월 21일 미군 2명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을 태운 열차를 지키고 있다. 45년 말 일본 군인들의 본국 송환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일본군 중 일부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1월 21일 미군 2명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을 태운 열차를 지키고 있다. 45년 말 일본 군인들의 본국 송환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일본군 중 일부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30일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실을 짐을 싸고 있는 일본인 가족의 모습이다. 한국에 체류하던 일본인들 중 민간인들의 송환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30일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실을 짐을 싸고 있는 일본인 가족의 모습이다. 한국에 체류하던 일본인들 중 민간인들의 송환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1월 14일 한국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다에 도착한 일본인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일본에 머무르던 국민들은 다시 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1월 14일 한국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다에 도착한 일본인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일본에 머무르던 국민들은 다시 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돌아오는 한국인들’

논과 밭을 잃고 생계를 찾아 떠나거나, 강제 연행돼 타향에서 눈물을 훔쳤던 이들도 해방 조국으로 돌아올 채비를 했다. 1945년 8월 기준 220만 명 정도였던 일본 체류 국민들은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모였고 승선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도 고스란히 필름에 담겼다. 1947년 9월까지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자 수는 약 186만 명으로 추정된다.

1945년 12월 일본에서 체류하다 해방 소식에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온 국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선박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선박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2월 일본에서 체류하다 해방 소식에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온 국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선박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선박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2월 전시(戰時)에 노동자로 일본에 끌려온 국민들이 선착장에서 고국으로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수송선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한 달 가까이 기다리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2월 전시(戰時)에 노동자로 일본에 끌려온 국민들이 선착장에서 고국으로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수송선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한 달 가까이 기다리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카다 항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카다 항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고향을 향하는 길에서 운명을 달리한 안타까운 징용자들도 있었다. 1945년 8월 24일 한국인 징용자들을 태우고 한반도로 향하던 배가 마이즈루항 근처에서 침몰해고, 이 사고로 희생된 사망자는 확인된 것만 500여명을 웃돈다. 사망자가 수천 명이 넘는다는 견해도 있다. 만주에서 돌아온 국민들의 수는 70만 명으로 추정된다.

1945년 5월 28일 만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한 소녀가 인천에 세워진 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이(louse)를 없애고 있다.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 머물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5월 28일 만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한 소녀가 인천에 세워진 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이(louse)를 없애고 있다.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 머물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인천항의 난민캠프에서 한 요리사가 큰 솥에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난민 수백 명이 매일 톈진에서 돌아왔고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서 생활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인천항의 난민캠프에서 한 요리사가 큰 솥에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난민 수백 명이 매일 톈진에서 돌아왔고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서 생활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고국을 떠났던 이들이 일본에서 귀환하고 있다. 부산항에서 하선하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고국을 떠났던 이들이 일본에서 귀환하고 있다. 부산항에서 하선하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해방공간의 일상’

해방조국으로 돌아온 국민들이 꿈꾼 것은 단란한 일상으로의 복귀였다. 밭이 갈리고, 공장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도로 보수도 시작됐다.

1948년 2월 28일 덕수궁 건너편 건물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던 석조전 건물로, UN임시위원단의 회의장소로도 사용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2월 28일 덕수궁 건너편 건물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던 석조전 건물로, UN임시위원단의 회의장소로도 사용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반도호텔에서 찍은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 이 건물은 미군정청과 과도입법의원이 사용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반도호텔에서 찍은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 이 건물은 미군정청과 과도입법의원이 사용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5월 총독부 뒤편의 경복궁에서 전국중등학교음악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멀게는 부산과 남부 지역에서도 올라왔다.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베토벤과 브람스 등을 연주한 교향악단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5월 총독부 뒤편의 경복궁에서 전국중등학교음악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멀게는 부산과 남부 지역에서도 올라왔다.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베토벤과 브람스 등을 연주한 교향악단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5월 총독부 뒤편의 경복궁에서 열린 전국중등학교음악대회 이틀째 행사에서 서울교향악단이 베토벤과 브람스를 연주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5월 총독부 뒤편의 경복궁에서 열린 전국중등학교음악대회 이틀째 행사에서 서울교향악단이 베토벤과 브람스를 연주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 젊은 남자가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있다. 작고 시설도 열악한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애잔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 젊은 남자가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있다. 작고 시설도 열악한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애잔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5월 서울의 도로를 보수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5월 서울의 도로를 보수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력공급이 중단된 사이 노동자들이 버핑머신을 이용하여 일상적인 철로 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 항구도시의 전기바지선이 모든 산업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력공급이 중단된 사이 노동자들이 버핑머신을 이용하여 일상적인 철로 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 항구도시의 전기바지선이 모든 산업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5월 위생소가 만들어진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청소차가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5월 위생소가 만들어진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청소차가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제27헌병분견대가 안전운전을 위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사진은 T. P. 로렌스 상병이 운전하는 207헌병대 소속의 지프차로 사고 방지 캠페인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제27헌병분견대가 안전운전을 위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사진은 T. P. 로렌스 상병이 운전하는 207헌병대 소속의 지프차로 사고 방지 캠페인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경기중학교의 한 교실에서 학생들이 수학을 공부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경기중학교의 한 교실에서 학생들이 수학을 공부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서울 경기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교사는 보스턴 출신의 중위로 칠판에 쓰여진 문구 "I am an American. You are a Korean boy. You are my friend."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서울 경기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교사는 보스턴 출신의 중위로 칠판에 쓰여진 문구 "I am an American. You are a Korean boy. You are my friend."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4월 11일 식자공들이 새 교과서를 위해 식자작업을 하고 있다. 사용 중인 활자에는 한국어, 영어, 한자, 일본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6년 4월 11일 식자공들이 새 교과서를 위해 식자작업을 하고 있다. 사용 중인 활자에는 한국어, 영어, 한자, 일본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3월 조선은행 창구에서 은행원 두 사람이 지출 및 수납 업무를 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3월 조선은행 창구에서 은행원 두 사람이 지출 및 수납 업무를 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젊은 여성들이 전화 교환소의 교환기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젊은 여성들이 전화 교환소의 교환기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서울 중앙방송국(HLKA)의 라디오 제어실의 모습. 서울중앙방송국은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으로 1927년 경성방속국으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이후 1947년 국영으로 다시 출범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서울 중앙방송국(HLKA)의 라디오 제어실의 모습. 서울중앙방송국은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으로 1927년 경성방속국으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이후 1947년 국영으로 다시 출범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북한이 전력공급을 중단했지만 한강의 급수시설은 문제없이 운영됐다. 전기바지선이 모든 시설에 전기를 공급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북한이 전력공급을 중단했지만 한강의 급수시설은 문제없이 운영됐다. 전기바지선이 모든 시설에 전기를 공급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북한으로부터의 전력공급이 중단된 후 남한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전기바지선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북한으로부터의 전력공급이 중단된 후 남한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전기바지선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열차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선 남녀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열차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선 남녀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인천행 3등 열차 내부가 사람들로 붐벼 통로까지 꽉 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인천행 3등 열차 내부가 사람들로 붐벼 통로까지 꽉 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남성 두 사람이 임시 외양간에서 소에게 굽을 박을 준비를 하고 있다. 소를 묶어두기 위해 사슬과 밧줄을 사용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남성 두 사람이 임시 외양간에서 소에게 굽을 박을 준비를 하고 있다. 소를 묶어두기 위해 사슬과 밧줄을 사용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주부 두 사람이 집 근처 개울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미국병사는 ‘비누가 부족하고 한국 전통의 흰 옷을 빨기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두 사람은 평생 해온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쪼그려 앉아 나무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주부 두 사람이 집 근처 개울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미국병사는 ‘비누가 부족하고 한국 전통의 흰 옷을 빨기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두 사람은 평생 해온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쪼그려 앉아 나무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농민들이 발로 작동시키는 탈곡기로 일을 하고 있다. 서울 근교의 작은 마을로, 탈곡을 마친 볏단은 줄로 묶어 보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농민들이 발로 작동시키는 탈곡기로 일을 하고 있다. 서울 근교의 작은 마을로, 탈곡을 마친 볏단은 줄로 묶어 보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한 농촌에서 여성들이 새로 수확한 벼를 탈곡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한 농촌에서 여성들이 새로 수확한 벼를 탈곡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한 마을 잔치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전통 민요를 부르고 있다. 잔치는 해방 이후 매년 개최됐다고 기록된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한 마을 잔치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전통 민요를 부르고 있다. 잔치는 해방 이후 매년 개최됐다고 기록된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3월 서울 근교에 위치한 경성방직 방적공장의 정경기(整經機) 앞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3월 서울 근교에 위치한 경성방직 방적공장의 정경기(整經機) 앞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3월 경성방직 방적공장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옷감에 문제가 없는지 검사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3월 경성방직 방적공장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옷감에 문제가 없는지 검사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9월 동화고무공장에서 신발이 다양한 크기의 금속 주형 위에 놓여 있다. 이 작업을 마친 신발들은 40분 정도 건조과정을 거친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9월 동화고무공장에서 신발이 다양한 크기의 금속 주형 위에 놓여 있다. 이 작업을 마친 신발들은 40분 정도 건조과정을 거친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동화고무공장에서 노무화의 바닥부분을 만들기 위해 달군 칼로 바닥 형태를 잘라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동화고무공장에서 노무화의 바닥부분을 만들기 위해 달군 칼로 바닥 형태를 잘라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6월 서울 의주로 담배공장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담배잎을 궐련이나 파이프에 적합하게 자르는 기계에서 나온 담배잎을 확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6월 서울 의주로 담배공장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담배잎을 궐련이나 파이프에 적합하게 자르는 기계에서 나온 담배잎을 확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6월 서울 의주로의 한 담배 공장에서 여성들이 담배갑을 접고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전매국에서는 ‘승리’라는 담배를 만들었다. 당시 담배 1갑의 가격은 3원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6월 서울 의주로의 한 담배 공장에서 여성들이 담배갑을 접고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전매국에서는 ‘승리’라는 담배를 만들었다. 당시 담배 1갑의 가격은 3원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부산의 한 시장에서 국수를 팔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부산의 한 시장에서 국수를 팔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10월 도로 한편에 마련된 장터에서 한 여성이 짝이 맞는 신발을 찾고 있다. 고무신은 한국에서 수요가 매우 높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10월 도로 한편에 마련된 장터에서 한 여성이 짝이 맞는 신발을 찾고 있다. 고무신은 한국에서 수요가 매우 높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신발수선공이 노점에서 신발을 수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신발수선공이 노점에서 신발을 수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10월 서울의 한 시장에서 한 여성이 아이를 등에 업고 물건을 살펴보고 있다. 해방 당시에는 섬유제품과 공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10월 서울의 한 시장에서 한 여성이 아이를 등에 업고 물건을 살펴보고 있다. 해방 당시에는 섬유제품과 공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10월 막대기 몇 개와 천막, 상자, 볏집으로 지붕을 삼은 노점의 모습. 이들 노점은 일종의 만물상의 역할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10월 막대기 몇 개와 천막, 상자, 볏집으로 지붕을 삼은 노점의 모습. 이들 노점은 일종의 만물상의 역할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전주 한 시장의 풍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전주 한 시장의 풍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4월 한 노천시장의 식당 선반위에 밥과 자반생선, 김치, 콩나물, 시금치, 두부이 놓여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4월 한 노천시장의 식당 선반위에 밥과 자반생선, 김치, 콩나물, 시금치, 두부이 놓여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생 대한민국의 출발’

1948년 5월 10일에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속에 남한 지역 총선거가 실시됐다. 선거를 통해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제헌국회를 구성하였다. 5·10 총선거는 21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으며, 5·10 총선거가 실시되기 전, 이를 홍보하기 위한 전단이 국토 곳곳에 살포되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탄생이 선포됐고,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중앙청 앞에 모여든 많은 군중들의 모습과 태극기의 모습도 흑백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1948년 5월 제24군단 연락반 소속 L-5 연락기에 전단을 싣고 있다. 조종사는 디트로이트 출신의 Charles L. Kureth 중위이며, 이륙 전 엔진을 예열하는 중이다. 전단은 다가오는 선거 날짜를 알리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으로 남부 지역 일대 마을에 살포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제24군단 연락반 소속 L-5 연락기에 전단을 싣고 있다. 조종사는 디트로이트 출신의 Charles L. Kureth 중위이며, 이륙 전 엔진을 예열하는 중이다. 전단은 다가오는 선거 날짜를 알리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으로 남부 지역 일대 마을에 살포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서울 인근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이 L-5 연락기가 뿌린 선거 홍보 전단을 앞다퉈 줍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서울 인근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이 L-5 연락기가 뿌린 선거 홍보 전단을 앞다퉈 줍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전남 영산포의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선거유세를 보기 위해 모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전남 영산포의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선거유세를 보기 위해 모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선거가 열린 1948년 5월 10일 투표소 입구에서 유권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선거가 열린 1948년 5월 10일 투표소 입구에서 유권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10일 신분을 확인하고 빈 투표용지를 받는 유권자. 뒤편의 여성은 투표용지를 작성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10일 신분을 확인하고 빈 투표용지를 받는 유권자. 뒤편의 여성은 투표용지를 작성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워 10일 한 여성유권자가 투표함에 용지를 넣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워 10일 한 여성유권자가 투표함에 용지를 넣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11일 전날 있었던 선거의 투표용지를 세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개표는 투표 종료 2시간 뒤에 개시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11일 전날 있었던 선거의 투표용지를 세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개표는 투표 종료 2시간 뒤에 개시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선거결과 방송을 하는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선거결과 방송을 하는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31일 첫 국회 개회에 앞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앞에 앉은 6명의 외국인은 경제고문 번스(왼쪽부터 두번째), 정치고문 제이콥스(세번째), 주한미군사령부 사령관 하지 중장(네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다섯번째), 군정장관대리 헬믹 소장(여섯번째), 교황사절 몬시뇨르 패트릭 번스 주교(일곱번째)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5월 31일 첫 국회 개회에 앞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앞에 앉은 6명의 외국인은 경제고문 번스(왼쪽부터 두번째), 정치고문 제이콥스(세번째), 주한미군사령부 사령관 하지 중장(네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다섯번째), 군정장관대리 헬믹 소장(여섯번째), 교황사절 몬시뇨르 패트릭 번스 주교(일곱번째)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식을 보기 위해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수립식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등의 연설도 이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식을 보기 위해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수립식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등의 연설도 이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중앙청 앞에 모여든 군중들이 대한민국의 탄생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8월 중앙청 앞에 모여든 군중들이 대한민국의 탄생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앞으로도 현대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수집해 현대사 연구가 발전되고 풍부해지도록 하고 많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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