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필리핀 대선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내세운 야당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후보가 당선됐다. 다바오시(市) 현직 시장이기도 한 그는 유세 과정에서 “6개월 내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는 등 초헌법적 공약으로 큰 논란을 불렀다. 22년 간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필리핀의 범죄수도라는 다바오를 필리핀은 물론이고 동남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연한 강력범죄에 지친 유권자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인권유린, 독재회귀 등 민주주의의 급격한 퇴보 우려 또한 무성하다.
그의 행적으로 보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재임 중 암살단인 자경단을 조직해 1,000명이 훨씬 넘는 범죄자를 재판절차도 없이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고, 성폭행 범죄자 3명을 직접 총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3월 유세에서는 “마약밀매업자와 조직범죄자 등 10만 명을 처형해 바다에 던져 물고기가 살찌게 하겠다” “자식이라도 마약을 하면 죽이겠다” “피비린내 나는 대통령 자리가 될 것”등의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군인과 경찰의 공권력 행사도 최대한 보장해 이들이 직권남용으로 기소될 경우 “하루 1,000건의 사면장을 발부하겠다”고도 했다. 막말과 욕설, 여성비하 발언도 셀 수 없을 정도다. 마치 1960년대부터 20년 넘게 필리핀을 철권 통치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공포정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도 그가 국민의 선택을 받은 건 베니그노 아키노 현 대통령의 무능과 실정 탓이 크다. 아키노 대통령은 집권 6년 동안 착실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급증하는 범죄와 빈부 격차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지난해 필리핀 빈곤층은 전체 인구의 26.3%였다. 10년 전보다 절대 빈곤층이 오히려 늘어났다. 범죄는 같은 기간 88만5,000여 건으로 2014년에 비해 46%나 늘었다.
두테르테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자리를 굳힌 도널드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이민 장벽을 쌓겠다” “중국이 미국을 성폭행하고 있다”는 등 상식 밖의 언행에도 지지가 몰리는 것은 현 정부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달 페루 대선에서 1990년대 독재자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과 아들이 대통령과 국회의장 유력 후보에 오른 것도 비슷하다.
이런 상황이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정치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면, 민주질서를 흔드는 우익 포퓰리즘의 발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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