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佛 기메박물관 개인전
고향 청도서 제작한 숯덩어리
불꽃 에너지 머금은 자연 표현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의 4층 돔형 홀에 검은 숯덩이 여러 개가 자리를 잡았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작가 이배(59)의 설치작품이다. 그는 19일(현지시간)부터 개인전 ‘이배에게 백지위임(Carte blanche a Lee Bae)’을 열고 고향인 경북 청도군에서 가져온 숯덩이 설치작품과 숯으로 그린 회화 3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가 열리는 기메박물관은 서남아시아에서 동아시아 삼국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오랜 유물과 고미술품을 모아놓은 전시공간인데, 이례적으로 현대미술 작가에게 전시장을 내주고 전시 구성을 제목 그대로 ‘백지위임’했다. 이배는 “기메박물관은 성스러움이 깃든 불상이나 힌두교 신상 등이 많이 설치된 곳이라 나도 거기에 걸맞은 ‘자연 근원의 힘’을 표현하는 작품을 해야겠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답은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숯이었다. “소나무를 2주 동안 불에 구운 후 2주 동안 삭혔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무가 100% 탄화됩니다. 모든 일상성이 사라지고 정결하고 순수한 불꽃의 에너지를 머금은 나무가 되는 거죠.” 이렇게 완성된 숯을 끈으로 묶은 덩어리를 전시장에 세웠다. 숯덩어리의 무게는 하나에 30~40㎏ 정도다. “청도에서 프랑스까지 숯을 가져오는 것 자체가 내 작업의 일부입니다. 선사시대의 거석을 움직여 세운다는 기분으로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이배는 프랑스에서 26년째 활동 중이다. 1979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다 1990년 1월 서양미술을 현장에서 공부하고 싶어 파리에 왔다. 물감을 살 돈이 없어 대용으로 구매한 바비큐용 숯이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됐다. “어쩔 수 없이 만난 숯이었지만, 계속 숯을 쓰다 보니 퍼뜩 제가 숯의 문화권에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문화적 배경을 불어넣어 작품을 그리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다고 이배가 동양적인 이미지에 안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동양의 미술을 소개하되 표현은 서양미술의 방식으로 하려고 한다”고 했다. 특히 동양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백의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서양인들은 여백을 단순히 그림을 그리지 않은 곳이라 생각하고 그 공간이 의도적으로 비워져 있는 그림의 일부분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배는 여백을 흰색으로 칠했다. 캔버스에 먼저 숯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그 위를 흰색 아크릴 물감으로 덮고, 이것을 4~5차례 반복한다. 캔버스 전체는 흰색 물감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아래에서 비쳐보이는 숯 그림이 마치 한지에 스며든 먹처럼 은은한 동양화 느낌을 낸다.
이배는 내년 8월까지 1년간 프랑스에서 진행될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에서 ‘프랑스 내 한국’의 대표 작가로 프랑스 화단의 관심을 받고 있다. 소피 마카리우 기메박물관장은 “내가 본 한국 작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라고 이배를 치켜 올렸다. 이배는 기메박물관에서 내년 1월 25일까지 개인전을 진행한 뒤 프랑스 북서쪽 브르타뉴 지방의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에서 3월 6일부터 전시를 열면서 4월 21일 청도의 달집태우기를 시연한다.
파리=글ㆍ사진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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