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종방한 한 인기 드라마에서 한바탕 싸운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있었다. 내용상 익살스러운 설정이었지만 이 드라마 속 작은 일화는 경어법의 본질이 상호 간의 배려와 존중에 있음을 보여 준다.
1910년대 소설 ‘무정’의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학생들에게 “시간이 늦어 미안하외다” “김 군, 읽어 보시오”처럼 학생들에게 하오체로 말한다. 교사의 권위보다는 성숙한 학생을 존중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다. 필자의 은사님은 1950년대만 해도 대학에서 선배가 후배를 ‘학형’이라고 부르고 말도 높였다고 하시면서, 후배에게 반말을 하는 우리의 수직적인 말 문화를 지적하기도 하셨다.
이미 중학생이 되는 순간 아이들은 선배에게 존댓말을 쓰고,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한다. 주고받는 말에서 엄격한 상하 관계가 세워지고 마는 것이다. 거의 동년배라고 할 아이들이 “야, 너 이리 와” “예, 무슨 일이세요?”처럼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존댓말과 반말을 주고받는 청소년들의 불평등한 언어문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사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말 경어법이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반영한다는 비판적인 견해들도 적지 않다. 경어법은 우리말의 미덕이지만, 권위와 복종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수단일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밝고 아름다운 청소년 시기, “언니, 안녕히 가세요”보다는 “언니, 잘 가” 하는 말이 어울려 보인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평등한 말 문화를 만들어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