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성 기자

등록 : 2018.06.14 16:34
수정 : 2018.06.14 16:35

[뒤끝뉴스] 양보만 했다고? 트럼프를 위한 변명

등록 : 2018.06.14 16:34
수정 : 2018.06.14 16:35

세계 이목 쏠렸던 첫 北美 정상회담

선언문 액면만 보면 승자는 김정은

그러나 트럼프가 준 건 ‘립서비스’

협상 테이블에 붙잡아두려 달랜 듯

핵 방치한 美주류와 트럼프 ‘거리’

장기 동북아 전략적 이익엔 무관심

트럼프 근시안은 한반도에 ‘축복’

거래 성사되게 文대통령이 양측 보증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12일 싱가포르의 센토사 섬에서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을 갖고 이 자리에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고 13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끝났다. 일단 공동선언문 액면만 보면 승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그토록 바라던 북미 적대관계 청산 계기와 종전(終戰) 단초가 마련됐고, 자신이 실천해야 할 비핵화에 줄곧 미국이 요구해 온 까다로운 조건들이 매달리는 일도 막아냈다. 막연한 상태로 남긴 것이다. 비핵화 범위 역시 바라 온 대로 제 땅뿐 아니라 남측까지 넓혔다. 구두(口頭)지만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약속까지 받아냈다. 대체로 미국 언론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북한 편인 중국은 환호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거래의 달인’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양보만 했을 리 없다. 그럴 인물이 아니다. 과거 만나서도 내놓지 않던 것들을 이미 북한은 만나기 전에 꽤 많이 내놨다. 핵ㆍ미사일 시험 중단, 억류자 석방 같은 것들이다. 풍계리 핵 실험장은 벌써 허물었고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도 곧 없애기로 했다. 완성된 핵무기는 협상탁에 올리겠지만, 더 만들진 않겠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 선언문에 못 담았을 뿐, 받아놓은 약속이 더 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따져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준 건 ‘립서비스’ 같은 거다. ‘워 게임’(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북한과 잘 지내는 동안만이다. 북한이 비뚜로 나가 사이가 틀어질 경우 언제든 재개하면 그만이다. 방어 연습이야 호들갑 떨지 않고도 할 수 있다. 대화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겠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비핵화 때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하되 ‘최대 압박’ 등 자극적 표현을 쓰지 않겠다는 말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북한이 원하는 건 존중이다.

이로 미뤄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주려 한 선물은 신뢰다. 핵을 갖고 있다며 허세를 부려도 미국 앞에서 북한은 약자다.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일탈하지 않도록 대화 테이블에 붙잡아 두려면 해치지 않겠다고 안심시키는 게 먼저다. 내부에 비핵화 이유를 설득할 수 있도록 체면을 세워주는 일도 중요하다. 만나기 전엔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협상 상대를 몰아붙이다 막상 만나고 나면 배려하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의 기술’인지 모른다.

북핵 6자회담 성과인 2005년 9ㆍ19 공동성명만도 못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데 지금 형편은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북한이 핵 개발을 멈추게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다 만들어진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 해결 난도의 차원이 바뀌었고 어쩌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회담 이튿날인 13일 싱가포르 매체 스트레이츠 타임스 기사 제목처럼 이제 겨우 먼 평화 여정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복원된 대화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여부가 최대 성패 관건이다. 정상 간 협상이라, 서두르다 동티 나면 다시 회복하기도 쉽지 않다.

북핵 문제가 이 지경까지 된 데에는 미국 책임이 적지 않다. 통제 가능한 위협으로 판단하고 그 동안 방치하다시피 했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대륙 세력과 맞서 해양 세력이 방어선을 완성할 때까지 중국이라는 진짜 적을 아닌 척 견제하려면 북한이라는 가짜 적이 필요하기도 했다. 무리해 가며 한반도 위기를 해소할 의지가, 미국에게는 딱히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동맹이어도 한국의 불안을 자국이 동북아에서 추구하는 이익과 바꿀 미국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움직이고 있는 건 그가 미국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화당에서 배출됐지만 비주류 기업인 출신인 저 백인 대통령은 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선악 관념이 뚜렷한 공화당 보수주의자들과도 자신을 분리한다. 장사꾼답게 그는 이익에 밝고 국익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딱 자기 임기 내에서만이다. 장기적인 전략적 이익에 대한 고민은 없다. 그가 미 전략가들의 골칫거리인 까닭이다.

자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사면초가다. 워싱턴 내 지지 기반이 워낙 약한 ‘스캔들 메이커’여서다. 때문에 북핵 문제 해결로 국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 할 공산이 크다. 성공에 사활을 걸 듯하다. 첫 임기가 2년 남았다. 그 기간 내에 대중들에게 보여줄 가시적 성과를 저 포퓰리스트는 만들어야 한다. ‘가난한 핵 강국’에서 ‘핵 없는 부국(富國)’으로 국가 목표까지 바꾸고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 김 위원장도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 배를 탄 북미 지도자는 상대가 내부 적들을 이길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아이러니다. 미 대통령의 근시안은 한반도에 축복이다. 둘이 서로 돕게 하려면, 문재인 대통령의 양측 보증이 긴요하다. 싱가포르=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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