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등록 : 2017.03.18 04:40
수정 : 2017.07.01 16:07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젠더 평등은 단지 미래에만 있다

등록 : 2017.03.18 04:40
수정 : 2017.07.01 16:07

<3>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통찰한 여성혐오

#1

‘남자도 페미니즘 소설 잘 쓸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근거로 통용되던 작가

신원 밝혀지자 미 소설계에 ‘팁트리 쇼크’

#2

1977년 내놓은 ‘체체파리의 비법’에서

약자차별은 승자 없는 공멸이라는 통찰

혐오 권력에 빠진 이 시대, 여전히 유효

2005~2007년 미국에서 방영된 TV 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호러(Masters of Horror)' 중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원작소설을 극화한 에피소드 '체체파리의 비법(The Screwfly Solution)' 포스터. 쇼타임 제공

소설: 바니는 숲을 파괴하는 해충인 체체파리를 박멸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숲이나 다른 생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해충만 없애는 방법을 고안한다.

―번식만 방해하는 것이다. 페로몬을 풍기는 불임의 암컷을 풀거나 교미를 방해하는 약을 뿌린다.

한편, 미국에는 ‘아담의 아들들’ 교단이 기승을 부리는 중이다. 이들은 신의 계시를 받아 여성을 살해한다. 미국 전역에 여자의 시체가 넘쳐난다.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

남성들 사이에 퍼진 이 전염성 히스테리는 언론과 정치, 종교계의 외면 속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미국 전역을 휩쓴다. 정부 관료도 종교지도자도 언론인도 모두 남성이고 방관하거나 동조한다. 남자들은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 하에 여자를 살해한다. 일부 여성들은 ‘비밀여성’이라 불리는 위험한 부류라 제거할 수밖에 없다.

거리의 여자들은 얼굴과 몸을 가리고 걷는다. 바다에 여자시체가 흘러넘쳐 항해에 방해가 된다. 여자들의 시위도 있지만 무허가인 데다가 시위 과정의 과격성이 괘씸하게 여겨져 진압된다.

‘페미니즘 SF를 쓰는 헤밍웨이’라 불린 작가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70년대에 “남자도 훌륭한 페미니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증명”으로 불린 작가였다. 그는 “가장 남성적인 SF를 쓰는 남자”였고 “페미니즘 SF를 쓰는 헤밍웨이”라고 불렸다.

그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프리카 대륙을 밟은 최연소 모험가이기도 했다. 화가이자 예술비평가로 살던 그는 1942년 입대해 군인으로 근속했고, 이후 미 중앙정보국(CIA) 정보원으로 일하다가 퇴직 후 실험심리학 박사가 되었다.

팁트리는 1968년 첫 소설을 쓴 이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문체는 힘 있고 강렬했고, 남자답고 씩씩했다. 인류에 대한 지혜와 통찰이 있었다.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작가들과 편지로 교류했다. 친구들은 그가 정부 관료였거나 스파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팬들은 팁트리가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인 J.D. 샐린저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필명일 거라고도 했다.

SF 작가 로버트 실버버그는 팁트리가 50~55세의 남자로, 연방관료로 일했고 바깥활동을 좋아하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닌 사람이라고 추리하며 덧붙였다. “제인 오스틴의 글을 남자가 썼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헤밍웨이의 소설을 여자가 썼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팁트리의 소설은 남자의 소설이다.”

누군가가 팁트리의 주소를 찾아내 문을 두드린 적이 있지만 집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뿐이었다. 이 말을 들은 SF 작가 할란 앨리슨은 “그 여자가 팁트리 아니야?”하고 농담을 하며 웃었다.

1976년 팁트리는 친구들과의 편지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시카고 신문을 뒤져 조건이 맞는 사람의 부고를 찾아보았다. 브래들리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딸뿐이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여성이었다. 남편도 있는 61세의 할머니였다.

어린시절 아프리카를 여행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위키미디어

소설계를 강타한 ‘팁트리 쇼크’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8년간 써온 필명 외에는요.”(팁트리 주니어가 SFㆍ판타지 작가 어슐러 르귄에게 보낸 편지)

이 사건은 소설계 전체에 충격과 함께 젠더 편견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을 야기하여 ‘팁트리 쇼크’라는 말까지 생겼다. 자신의 편견을 재고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소설을 전부 재평가해야 한다는 말도 돌았다. 팁트리는 다시는 소설을 쓸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빠졌고 1987년,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편을 쏘고 그 자신도 자살했다.

계속, 소설: 여자들은 결국 지구에서 사라져간다. 남자로 변장해 숨어 사는 최후의 여자는 천사처럼 보이는 이들을 본다. 그들이 우리를 멸종시킨 것 같다. 생각해보니 지구는 사람만 없으면 좋은 곳이다. 하지만 전쟁은 자연을 파괴한다. 이 방법을 쓰면 친환경적으로 인간을 제거할 수 있다. 그들은 천사가 아니었다. 부동산업자인 것 같다.

1977년작,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소설 ‘체체파리의 비법’의 내용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통찰은 분명하다. 약자혐오의 끝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공멸이다.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람은 자신이 강자이자 정의구현자라 착각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다.

80~90년대 한국에서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연간 2만~3만 명의 여아가 성감별을 통해 낙태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열렬한 아들 사랑이 과연 아들들에게 이득이 되었을까. 현재 그 아들 6명 중 1명은 짝을 찾을 수 없고, 출산율을 높이려 해도 가임기 여성 자체가 없다는 자멸적인 현실만 남아 있다.

지난해 5월 아무 이유 없이 한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강남 살인사건'이 발생한 직후 서울 강남역 10번출구 옆에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와 꽃이 쌓여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약자혐오의 섬뜩한 결말을 그려낸 SF ‘체체파리의 비법’을 발표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이 시대에도 혐오라는 손쉬운 권력을 탐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혐오가 구름처럼 퍼지는 시대

가치를 쌓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혐오는 한 순간에 사회를 집어삼킨다. 버락 오바마의 우아한 정치를 겪고 나서도 미국인들은 이민자의 입국을 금지하고 멕시코에 장벽을 쌓겠다는 지도자를 택했다. 필리핀인들은 마약상인을 학살하기로 한 대통령에게 열광했다.

혐오해도 좋다는 허락만큼 황홀한 것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그런 허락을 힘과 권위를 가진 자가 해 준다면. 새털 같은 권위만으로도 혐오는 광풍처럼 번진다. 이 광풍에는 하다못해 악의조차도 없다. 혐오만큼 돈도 노력도 배경도 필요치 않은 권력이 어디 있겠는가. 간단히 권력을 쥘 수 있다는 유혹은 얼마나 달콤한가.

혐한(嫌韓)을 하는 일본의 넷우익은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무시만 받아왔다. 하지만 혐오를 시작하자, 나는 비로소 누군가의 위에 설 수 있었다.” 이 심리는 모든 혐오 발산자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도 최근 온라인상의 권위에 의한 혐오 발산의 광풍이 있었다. 반 년간 나무위키에 ‘서구에서 페미니즘은 몰락했고 지금은 성평등주의(equalism)가 대세가 되었다’는 이론이 게시되었고, 이 위키의 많은 문서가 이 이론에 근거하여 전면 수정되었다. 이 이론은 넷상에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강력한 근거로 쓰였고 정의당 당명을 붙인 현수막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이는 한 명의 네티즌이 조작한,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허위이론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몰락했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근거조차 뒤져보지 않은 것이다. 혐오 확산에 그리 대단한 권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시가 될 것이다. 고작 혐오라는 초라한 권력을 선망할 만큼 이 사회의 많은 것이 무너졌다는 증명이기도 할 것이다.

혐오의 끝은 공멸이라는 통찰

다시, 작품: 나라에 남자만 걸리는 치명적인 질병이 돈다. 남자의 숫자는 급격히 줄고 신체적으로도 형편없이 약해진다. 하지만 사회는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던 기존의 사회체계를 바꾸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이 와중에 여자들이 진짜 역사의 주역이 되지만, 이들은 남성으로 개명해 사서에 남자로 이름을 남기고, 역사는 마치 남자들이 세상을 꾸려간 것처럼 기록된다.

요시나가 후미의 대체역사 만화 ‘오오쿠’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비영미권 작품, 그리고 만화로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을 수상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삶과 문학을 기려, 젠더에 대한 문학적 시야를 넓힌 과학소설과 판타지에 수여되는 상이다.

SF와 판타지 소설을 비판하는 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문학이 세상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문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문학이 세상의 영향을 받지만 또한 세상이 문학의 영향을 받는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인권이 없었던 시대의 작가가 당대의 가치관을 비판 없이 반영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해 보라. 그 소설은 지금 아무도 찾아 읽지 않을 것이다. 문학이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가치를 상상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내일의 세상이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가치에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인류사를 통틀어 젠더 평등이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 현존하는 지구 그 어느 지역에서도 그렇다. 그 세상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고 단지 미래에 있다. 미래를 다루는 문학이 우리에게 꿈과 영감을 주는 이유다.

팁트리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났다.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는 “팁트리 주니어는 2017년에도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지금, 2017년이다.

김보영ㆍSF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1915년 8월 24일~1987년 5월 19일.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리 셀던. 변호사인 아버지와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며 보냈다. 화가이자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다 군에 입대해 군 정보원, CIA 정보원으로 일했고 제대 후 심리학 박사가 되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필명으로 SF 소설을 썼고 ‘가장 남자다운 SF를 쓰는 남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여성으로 밝혀지며 소설계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1991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기념상이 제정되어, 젠더 문제에 대한 문학적 시야를 넓힌 SF 소설과 판타지에 상이 수여되고 있다.

<소개된 책>

체체파리의 비법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이수현 옮김

아작 발행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이수현 황희선 옮김

아작 발행

오오쿠

요시나가 후미 글ㆍ그림

윤영의 옮김

서울문화사 발행

<소개된 영상>

https://1416andcounting.wordpress.com/2009/07/15/1551-the-screwfly-solution-masters-of-horror/

‘체체파리의 비법(The Screwfly Solution)’은 TV 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한 에피소드로 영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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