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된 ‘빅 히스토리’도 지적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제국 필요성 강조하는 건
일원화된 권력 만들려는 구실”
2015년 말 출간돼 지난해 한국을 강타한 책은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였다. 지난해 3월엔 때마침 ‘이세돌와 알파고간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인공지능(AI) 열풍이 거셌으니 이 책은 더더욱 환영받았다.
문제는 저술의 ‘수준’이었다. 가령 하라리가 인류의 뇌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인지혁명’이 한순간에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써놓은 것에 대해 이 책 번역을 맡았던 조현욱씨마저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부정적 의견을 내놓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독창적인 분석이나 이론을 찾기 어려운 ‘세련된 짜깁기’라는 평도 내놨다.
하라리는 지난해 4월 26일 방한기념 간담회에서 지구제국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제국이라 해서 반드시 독재, 폭력, 전쟁일 필요는 없다”는 발언까지 내놨다. 이웃한 옛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우리 덕을 보지 않았느냐’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있는 우리로선 결코 쉽게 들어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유려한 스토리텔링”이라는 격찬에 이런 문제는 뒤덮여버렸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하라리의 ‘사피엔스’, 그리고 이 책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빅 히스토리’에 대한 격한 비판이 나왔다. 박민영 문화평론가는 월간 ‘인물과 사상’ 1ㆍ2월호에 ‘빌 게이츠는 왜 빅 히스토리에 지원할까’ ‘빅 히스토리, 글로벌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연달아 실었다.
빅 히스토리는 인류 문명을 다루는 문명사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출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인류 출현과 진화까지 다룬다. 이런 광대한 서술을 통해 내놓는 결론은 인구증가, 에너지, 자원, 물, 지구온난화, 경제불평등 등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류 전체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 평론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제기를 시작한다. “지구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생각하면 되레 가장 최근의 역사를 더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나 전지구적 문제에 가장 큰 책임은 정치가와 자본가가 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얘기는 없다. 박 평론가는 “137억년 가량의 우주역사를 24시간으로 줄이면 인간의 역사는 1초에도 못 미친다”며 광대한 우주역사에 눈길이 쏠리면 “현대사회의 가장 첨예한 자본의 문제, 그 자본이 조정하거나 접수하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리 없다”고 주장했다.
지구제국이 건설된다 한들 진짜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박 평론가는 하라리가 ‘옛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라고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주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지구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는 “전지구적 문제 운운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원화된 권력과 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한 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박 평론가의 지적은 괜한 의심이 아니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다 대놓고 이리 써뒀다. “예컨대 프랑스혁명을 보자. 혁명가들은 왕을 처형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인권선언을 하고,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유럽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프랑스인의 생화학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했다. (중략) 이것이 프랑스인의 행복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박 평론가는 전화통화에서 “빅 히스토리와 하라리의 책에서 가장 답답한 부분은 우주와 문명에 대한 여러 얘기들을 물 흐르듯 다 잘 섞어서 말하는 데는 능숙한데, 정작 구체적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빅 히스토리와 하라리에게 요구할 것은 이제껏 나온 얘기들을 놀랍게 잘 융합해 들려주는 게 아니라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라고도 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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