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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꿈의 직업, 주부

입력
2015.09.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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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힘들거나 애 키우고 싶어… 주부의 삶 바라는 젊은 남성 늘어

현실에선 TV 드라마 속 이야기

함께 벌어도 빠듯해 퇴사 못하고 대기업서도 육아 휴직은 그림의 떡

쉬겠다는 여사원에 괜한 눈총만

백종원
백종원

만약 ‘백주부’ 백종원씨가 성공한 사업가가 아닌 그냥 요리 잘하는 남자였다면, 반대로 사업의 귀재이긴 하나 부엌에는 들어가지도 않는 전형적인 한국남자였다면, 그에 대한 열광은 없었을지 모른다.

수백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외식업계 성공남이면서 음식도 잘 만들고 게다가 다정하면서 유머감각까지 갖췄다는 것. 어쩌면 백종원 신드롬은 ‘백마 탄 남자’가 되고 싶은, 혹은 그런 남자를 기다리는 오랜 심리의 현대판 버전일지도 모른다.

배경이야 어떻든 백주부 열풍으로 인해 ‘남자주부’는 뭔가 부족한 남자이거나, 뭔가 특이한 성향의 남자로는 더 이상 여겨지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젊은 층 사이에선 주부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들도 또한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왜 주부를 자청하게 된 것일까.

주부, 될 수만 있다면 되고 싶다

하지만 백주부는 허상에 가깝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될 수만 있다면….’이라는 전제가 따라붙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지 않아도 가계가 굳건히 버텨주기만 한다면, 남자 살림꾼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그들도 기꺼이 주부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절벽세대’, ‘N포세대’가 별칭인 절망의 세대에게 이러한 전제들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다. 이성욱(34ㆍ회사원ㆍ가명)씨는 “사회 생활이 힘들 때면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전업 주부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근데 그게 가능하겠냐”라고 반문한다. 이씨는 “남자라고 해서 이리 처리고 저리 치이는 바깥 생활 안 힘든 거 아니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여자는 일해도 남자의 60~70% 밖에 못 번다고 하는데, 내가 나가 벌어야 하는 게 더 유리하지 않나”라고 털어놨다. 김도균(27ㆍ회사원)씨는 워낙 집안일에 소질이 있는데다가, 아이 돌보는 것을 좋아해서 여자친구가 먼저‘내가 나가 돈 벌 테니, 네가 가사와 육아를 맡아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김씨는 “여자친구의 제안이 반가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지나가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며 씁쓸해 했다. 맞벌이를 해도 벌어먹기 힘든 세상인데, 남자가 집안일을 하고 여자 혼자 가정을 이끌어나간다는 것 자체가 우스갯소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편‘셔터맨’이라는 구닥다리 코리안 드림에 천착하는 이들도 있다. 낡은 신조어 셔터맨은 IMF 사태가 한국을 휩쓸고 난 뒤, 졸지에 여성들의 생활력에 기대게 된 남성들의 슬픈 꿈이었다. 실업이 주는 안락함은 달콤하기까지 해, 셔터맨은 그들만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됐다. 이러한 셔터맨 드림은 IMF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현재의 2030세대에게도 유효하다. 최형우(26ㆍ회사원ㆍ가명)씨 역시 소위‘사자’들어가는 직업의 부인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 살림살이를 전적으로 도맡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최씨는 “약사, 교사 등 전문직 여성과 결혼해서 낮 시간에 살림하고, 책도 읽는 그런 생활을 꿈꾼다. 회사 생활이 참 힘들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최씨는 “약대에 다니는 동문에게 지속적으로 소개팅을 부탁하고 있다. 능력 있는 여성을 만나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이 태초부터 현모양처였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살림하는 것이 좋아서라기 보단, 당장의 고된 사회 생활 전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회피 본능이 더 크다. 김성민(28ㆍ회사원ㆍ가명)씨는 “가사 일을 하면서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를 하면 좋을 것 같다. 은퇴까지 회사 생활을 계속한다고 생각하면 갑갑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자취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웬만한 집안일은 다 할 줄 안다. 고무장갑만 깨끗하면 음식물 쓰레기 갖다 버리는 일도 도맡아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전업 주부는커녕 육아 휴직도 ‘그림의 떡’

하지만 셔터맨 생활은커녕 이들에게는 ‘한시적 주부 생활’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정부에서도 장려한다는 ‘아빠 육아’가 대표적이다. 고용노동부의 올해 상반기 남성 육아 휴직자 현황에 따르면 전체 육아휴직자의 100명 중 5명이 남성이고, 전체 인원 또한 2,200여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숫자조차 남의 얘기라는 이들이 많다. 남성 육아 휴직은 공무원, 외국계 기업 종사자 등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남성들의 입에서는 “남성 육아 휴직자는 본 적도, 건너 들은 적도 없다”, “남성 육아 휴직은 회사를 나갈 각오하고 쓰는 것” 등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결혼 1년 차인 한상욱(29ㆍ회사원ㆍ가명)씨 역시 남성 직원이 대부분인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어, 육아 휴직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한씨는 “애초부터 부인이 육아 전담을 위해 직장을 그만뒀고, 퇴근 후에 가사 일을 일부 거드는 데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빠,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은데 어쩔 수가 없다. 육아 휴직을 쓰고 있는 친 누나를 보면 마냥 부러운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박상민(29ㆍ가명)씨 역시 “대기업이라고 해서 남성 육아 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사내에서 한 명 정도 본 적은 있는데, 복귀 후에 회사는 잘 다니고 있나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대기업 실상도 이러니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체는 더 심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박 육아’도 억울한데…특권으로 변질된 주부 생활

남성들이 쉽게 주부가 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여성들마저 주부 역할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최아현(27ㆍ회사원ㆍ가명)씨는 둘째를 낳고 두 번째 육아 휴직을 보내고 있다. 최씨는 주변 지인들로부터“두 번이나 육아휴직을 하다니, 회사에게 고마워 해야겠다”, “회사에서 좋은 건 다 뽑아 먹네”, “셋째는 안 낳을 거지? 미안해서 낳겠냐”, “너 때문에 앞으로 여직원 뽑으려고 하겠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최씨는 남편의 육아 휴직이 쉽지 않아 혼자 육아를 책임지는 ‘독박육아’를 하고 있지만, 억울하게도 권리가 아닌 ‘특권’을 누리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부하 직원의 임식 소식에 대한 대응법’ 매뉴얼이 따로 있을 만큼 워킹맘을 배려하는 분위기를 정착시키려고 하지만 직원 한 명 한 명의 선입견, 편견까지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더 억울한 것은 독박 육아를 하는 엄마들을 향한 시선이다. 잠시 육아와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유모차를 끌면서 커피를 마시는 행위,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 잠시 바람을 쐬고 쇼핑을 즐기는 일까지, 사람들은 ‘참 한가롭다’, ‘남편 등골을 빼먹는다’며 험한 말을 던진다. 하루 종일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에 시달리는 시간은 지워져 버린다.

남성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육아 휴직은 쉬러 가는 것’이라는 싸늘한 시선이 여전하다. 한씨는 “조직 융화 차원에서 남성 사원들은 복지 혜택을 누리고 싶어서 참는데, 여성 사원들이 권리를 누리는 걸 보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씨 역시 “어떤 상사들은 ‘육아보다 회사 일이 더욱 힘들다’라는 생각을 직원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여직원들의 군기를 잡으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가장과 주부, 막상 역할 바꿔보면 생각 달라진다

맞벌이 시대는 도래했는데 매일 야근하는 아빠, 혼자 집안일ㆍ육아를 감당하는 엄마의 모습은 여전하다. ‘바깥 생활은 남자가, 안살림은 여자가’라는 사회적 인식이 그대로인데, 남녀 임금 평등, 남성 육아 휴직 등 제도 정착까지 쉽지 않아 서로의 역할과 노고를 폄하하는 과도기 증세가 나오고 있다.

1년간 육아 휴직을 통해 주부의 역할을 경험한 정민승 한국일보 기자 역시 실제로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주부들의 고통을 몰랐다고 말한다. 정 기자는 “나도 육아 휴직을 하기 전에는 바깥에서 아기 엄마들을 보며 ‘팔자 좋다’, ‘애들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고 나니, 그렇게라도 안 하면 스트레스를 풀 때가 없더라”고 말했다. 육아를 분담해 줄 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육아고독’은 지독한 병이다. 정 기자는 “군대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동변상련을 나눌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며 “나에게도 같은 처지에 있는 동네 엄마들과 수다 떠는 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남편이 1년간 전업 주부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역할을 했던 정 기자의 부인도 이제는 남편의 고충을 더 잘 알게 됐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다시 맞벌이 부부로 돌아왔지만 번갈아 가면서 주부와 가장의 삶을 경험한 부부는 자연스레 역지사지의 자세를 배웠다는 것. 정 기자는 “부인이 혼자 아이를 돌볼 때는 왜 빨리 퇴근 안 하냐는 연락이 잦았다. 하지만 1년 동안 홀로 생계를 책임져 보고 난 뒤에는 남편의 생활도 많이 이해해 주게 됐다”고 말했다.

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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