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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처벌 물렁" 들끓는데.. 법 조항에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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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처벌 물렁" 들끓는데.. 법 조항에 발목

입력
2016.03.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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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내용 쪽지, 몰카 촬영 등에

죄형법정주의 집착해 면죄부

“피해자의 수치심엔 무시경

국민 감정과 동떨어져” 비판 고조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전신촬영 몰래카메라 사건’ 무죄 선고를 비롯해 법원의 성범죄자 판결을 두고 비판 여론이 수 차례 이어졌다. 성범죄 피해자를 비롯한 상당수 시민들은 법원의 판단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다고 지적하는 반면 법원의 입장은 “피해자 중심의 선고가 형사사법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이어서 충돌이 반복된다. 법원의 지적대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법 조항을 구체화하는 한편 법원의 접근법 역시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택시운전사 A씨는 2014년 6월 16일 오전 3시쯤 대구의 한 상가 주변에서 술에 취한 B양(당시 16세)에게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아동청소년보호법 위반)로 기소됐다. 하지만 법원은 “미성년자인지 몰랐다”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인 여성에 대한 강간 미수죄를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한 B양이 민소매 셔츠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 청소년이 그 시간까지 술에 취해 귀가하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예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여성단체 등은 청소년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재판부의 시각이 그대로 반영된 판결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 청소년 음주율이 16.7%에 달하는데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일선 초ㆍ중ㆍ고교에 ‘올바른 화장품 사용법’을 홍보하는 상황인데도 법원은 동떨어진 현실인식으로 피고인의 이익을 지나치게 대변한다는 것이다.

비판 여론이 제기될 때마다 법원이 내세우는 반박근거는 피고인이 저지른 행동과 처벌을 명확히 규정한 법률이 있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다. A씨의 경우에도 대법원은 아청법이 피해자가 미성년자에 해당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처벌을 명시하지 않은 이상 A씨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10일 대법원이 옆집 여성의 집 문 앞에 음란한 내용이 담긴 쪽지를 전한 혐의(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이용음란)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 취지로 파기한 판결도 마찬가지다. 법 조항은 우편, 컴퓨터 등으로 음란물을 전달한 경우 처벌하도록 하고 있지만 직접 전달한 경우에 대해서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고, 법원은 쪽지가 통신매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수치심과 위협감을 야기한 효과는 오히려 더 클 수 있는데도 직접 전달한 쪽지는 통신이 아니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엄격한 법 조항 해석에 따른 판결’이라는 법원의 원칙 자체는 반대할 여지가 없다. 다만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에 법리를 적용해 감형 또는 무죄를 내린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서울북부지법은 귀가하던 여성을 뒤쫓아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몰래 사진을 촬영한 유모씨에 대해 피해자의 노출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난해 5월 해당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같은 재판부는 지난해 5월 피고인이 지하철과 횡단보도 등지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몰래 촬영한 사건에서 전신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볼 때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죄로 판단한 공통된 이유였는데, 엘리베이터까지 일부러 쫓아가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촬영한 것마저 성적 욕망을 유발한 게 아니라는 판단은 일반인이 수긍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일부 법관들이 법리 적용이 어려운 사건에 적극적 판단을 내리길 꺼리면서 ‘죄형법정주의’를 빌미로 내세울 뿐이라고 지적한다. 정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판사들이 오판이나 주관 개입 염려 때문에 법조문대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때문에 국민의 법감정에 위배되는 판결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피해자의 수치심 및 가해자의 성적 욕망 충족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이를 제쳐두고 (임의로 설정된) ‘평균적인 일반인’의 관점으로 유ㆍ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하급심과 상급심의 엇갈리는 판결이 법원에 대한 의구심만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신진희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성적 수치심 유발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성범죄 처벌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며 “1, 2심이 유죄 선고한 것을 대법원이 엄격하게 해석해 뒤집으면 고무줄 판결이라는 인식을 준다”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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