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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움직이는 ‘말’의 힘을 믿은 불세출의 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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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움직이는 ‘말’의 힘을 믿은 불세출의 만담가

입력
2016.02.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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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출(오른쪽)과 신은봉. 신불출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들과 만담을 했고, 신은봉은 신불출과 가장 많이 만담 작업을 했던 여배우 중 하나였다.
신불출(오른쪽)과 신은봉. 신불출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들과 만담을 했고, 신은봉은 신불출과 가장 많이 만담 작업을 했던 여배우 중 하나였다.

한 사람이 머물다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겨질까? 아마도 그것은 기억, 그리고 기억하는 자들의 ‘말’(言)일 것이다. “세기의 만담가”, “동방의 웃음보”, “만담의 천재”로 불렸던 식민지 시기 최고의 만담가이자 연극배우, 시인, 극작가였던 신불출은 ‘말’로써 살았고, ‘말’로서 남겨진 독학자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인이었던 신불출의 삶의 궤적에 대한 ‘말’은 매우 분분하다. 그의 출생부터 본명, 학력, 사망에 이르기까지 여러 설들만 난무하고 있다. 신불출의 본명은 신상학, 신영일, 신흥식 중 하나이며 1905년 혹은 1907년에 서울 또는 개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월북 이후에는 1962년경 숙청되었다고도 하고, 1967년 뇌출혈로 인한 안면마비가 온 뒤 연구에 매진하다 1969년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 탈북자는 신불출이 1975년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신불출에 대한 회고와 증언, 기록들은 이토록 엇갈리고 있다. 심지어 그의 동료, 제자, 지인들이 기억하는 신불출의 본명조차 각기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제는 곁에 없는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월북 인사였고, 북한에서도 숙청된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야 복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담가 신불출의 생애는 확정되지 못한 역사로 남게 되었다. 신불출과 함께 식민지 조선 대중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만담’이라는 장르 역시 이제는 과거의 어떤 것으로만 남겨져 있다. 신불출은 지금은 거의 쇠멸한 양식인 ‘만담’을 창안하고 전파했던 독학자였다.

형식의 틀을 깨고 의미를 발명하다

식민지 조선에서 ‘만담’은 이전까지는 없던 새로운 장르였다. ‘만담’이라는 용어는 있었지만, 주로 흥미 있는 이야기나 기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현재처럼 풍자와 해학이 있는 우스운 대사 공연이라는 용례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불출의 만담이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다.

“영감님 대가리는 문어 대가리. 어부 있는 해수욕장 못 간다누나∼ 영감님 대가리는 후도뽈(축구공) 대가리. 모자 벗고 운동장엔 못 간다누나”라는 우스꽝스러운 대사가 담긴 만담 ‘익살맞은 대머리’는 1933년 유성기 음반으로 발매된 지 보름 만에 2만 장이 팔려나갈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신파극과 무성영화 등 새로운 양식의 서사물과 미디어가 조선에 도입되고 관심을 끌던 시기의 일이었다. 신불출의 만담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종로거리 축음기 상회에서 흘러나오는 만담을 들은 한 노인이 만담 소리를 따라 웃자 옆에서 같이 듣고 서 있던 사람들도 다 함께 박장대소하는 에피소드가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1933년 오케레코드에서 유성기판으로 발매된 '대머리'는 보름 만에 2만 장이 팔려나갈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933년 오케레코드에서 유성기판으로 발매된 '대머리'는 보름 만에 2만 장이 팔려나갈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신불출은 유성기 만담 음반의 대성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운이 좋아 얻어걸린 성공은 아니었다. 연극배우 고설봉은 신불출이 언제나 독학으로 다방면의 책을 읽었고,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그때 그때 물어서 꼭 짚고 넘어가는 노력파였으며, 연습벌레였다고 회고한다. 2인 만담이 아닌 독만담이 가능할 정도의 입담과 재치, 상식을 가진 실력자가 되기까지 끈질긴 독학의 시간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독학이 의미 있는 것은 피나는 노력으로 조선 만담계의 1인자가 되었다는 교훈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구사하는 만담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사람이었고, 그 독학의 과정은 자신이 발 딛고 선 조선 공연계가 처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공연계는 자본난과 극장 부족, 검열 등 여러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영세한 극단과 배우들이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연극계에 몸담았던 신불출 역시 조선극계의 어려운 사정을 보고 겪고 있었다. 당시 극단의 연극배우들은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으며 동시에 연출가이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각 분야가 뚜렷하게 나뉘어져 전문화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 극 공연의 전반을 두루 담당하는 인력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연예술계 자본과 인력의 열악함 때문이기도 했다. 돈이 없었고, 전문화된 인력도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자연스럽게 담당했던 것이다. 신불출 역시 1920년대 후반부터 극단에서 극본을 쓰고 연기를 했던 극작가이자 배우였다.

유성기판 만담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1930년대 초반 신불출.
유성기판 만담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1930년대 초반 신불출.

조선 평단의 “유식한 무식쟁이”들에게 일침

신불출은 “조선극계에 새로우면서도 돈 안 들고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무대 형식을 마련하기 위해 서양과 중국, 동경의 극 형식을 책으로도 보고 견학도 하여 자신이 창안한 양식”이 ‘만담’이었다고 말한다. 일본에 불과 5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만자이’라는 것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혜택 받지 못한 문화의 유산” 속에서 “자기문화의 창조적 임무”를 가지고 조선의 사정에 맞게 창안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신불출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 어떤 의미와 동기를 찾으려 했던 사람이었고, 그 물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독학자였다.

신불출은 조선의 평단에도 가감없이 일침을 가했다. 조선 연극계의 실정을 무시한 채로 저급한 레코드와 연극이라며 혹평과 냉대로만 대하는 조선의 식자들을 “유식한 무식쟁이”라고 이르며 그들의 비판이 기술을 욕하는 것인지 작품 내용을 욕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며 경고한 것이다. 제대로 된 연극 각본 하나를 써내는 식자 한 명이 없는 환경에서, 반성 없이 욕만 하는 실정을 비판한 것이다.

‘만담’이나 신파극은 극예술의 한 분과로 인정받지 못하고 평단으로부터 폄훼와 배제의 대상이 되었지만, 당대의 대중들에게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 괴리 속에서 신불출은 ‘만담’이 지닌 의미를 창안하고 그것을 열악한 조선 사회와의 관계 위에서 말하려 했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주어진 형식과 토대에 안착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그 형식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독학은 존재할 수 있었다.

‘말’의 최전선에서…영광부터 숙청까지

신불출은 극장을 소유한 자본가도 아니고, 권력이나 명망을 지닌 평론가도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렇다 할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그에게 ‘말’은 유일한 자본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신민요인 ‘노들강변’의 작사자가 신불출이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연극과 만담의 대본을 썼고, 극계와 문단, 평단에 대한 평문도 여러 편 남겼다. 신불출이 유성기 음반의 도입이라는 신문물의 혜택에 힘입어 당대 최고의 인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행운은 ‘말’의 힘을 믿을 수 있던 시대에 그가 살았다는 점일 것이다.

어느 시기에나 구린 구석이 많은 정권과 권력은 ‘말’들이 모이고 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일제시대에도 신문과 잡지에 대한 검열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 공연장에는 임석경관이 앉아서 감시를 했다. ‘말’의 힘에 대한 공포를 가진 권력에 마주하여 ‘말’을 다루어야 했던 자들은 동시에 ‘말’의 권능을 믿고 실현하는 이들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공연을 펼치는 신불출은 늘 그 최전선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신불출이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1931)에서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라는 대사에 “여러분, 삼천리 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라고 대본에도 없는 말을 덧붙여 임검순사가 즉석에서 호각을 불며 공연을 중단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즉각 종로경찰서로 연행된 신불출은 서울 시내에서 다시는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다.

월북 이후 북한에서 출간된 책자에 실린 장년기 신불출의 모습.
월북 이후 북한에서 출간된 책자에 실린 장년기 신불출의 모습.

그러나 신불출의 ‘말’은 계속해서 그 자신의 안위를 계속 위협하게 된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공연 중에 태극기의 문양에 빗대 찬탁을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밝혀, 우익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미군정 포로령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 받기도 한다. 월북 후에도 역시 정치적인 발언과 만담을 아슬아슬하게 반복하다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월북 후 1961년 ‘신불출 만담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고, 인민배우로 칭송 받는 영예를 누렸던 것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에게 ‘말’의 힘이란 모든 영광과 고통을 함께 수반하는 것이었다.

신불출은 “만담에는 웅변이 없을 수 없”으며, “말로써 세상을 좌우할 수 있는 웅변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말’의 힘을 믿었고, 그 믿음은 시대의 믿음이기도 했다. 지금은 만담이라는 양식도 퇴조했고, 그 역시 세상에 없다. 지금은 공연으로서 명맥이 끊긴 만담이라는 한 양식을 창안하고 흥행시켰던 신불출은 만담처럼 한 시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독학은 그렇게 세상을 뒤틀어놓는다. 어쩌면 그 자신의 삶마저도.

그가 조선의 대중들에게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열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의 틈새를 비틀어 열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삶으로서 보여주었던 ‘말’이라는 독학의 한 양식을 기억할 것이다.

임세화 소설가ㆍ문학평론가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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