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야구해설이 내 직업은 아니었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 아르바이트 삼아 해설을 했다. 그런데 얼마 뒤 프로야구가 출범(1982년)하면서 KBS에서 전속으로 해설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나는 안정된 교직과 새로운 영역인 해설 사이에서 고민했다. “승희 아빠는 잘할 걸로 믿어요. 학교 선생님은 많지만 KBS 해설자는 전국에서 한 명이잖아요. 잘못되면 내가 김밥 장사라도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두려워요?”
아내의 권유는 이직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인 해설자로 활동하게 됐다.
내가 해설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야구 경력, 해설 커리어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한 수 위인 해설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에게 과감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난 분들이었기에 부끄럽거나 창피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분들은 나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내가 경쟁자로 여길 필요 없는 까마득한 후배였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은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1997년 작고)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나를 친동생 이상으로 대해 주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야구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박학다식했던 김 감독은 내가 해설자로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특히 내 트레이드마크가 된 ‘예측 해설’은 김 감독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사석에서 내가 김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구 해설자도 감독과 마찬가지로 승부를 걸어야 할 타이밍이 오면 과감하게 승부를 걸어야 한다.”
김 감독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경기에 질질 끌려가는 해설자는 오래가지 못해. 잘하고 있는 팀이 이길 거라고 말하는 건 해설이 아냐. 그런 해설은 일반인도 하지. 우리는 결과를 놓고 쫓아가는 해설을 했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마라. 포인트다 싶으면 과감하게 예상을 하고 네 해설을 해라. 물론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게 승부수다.”
나는 김 감독의 조언을 내 해설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의식적으로 승부 포인트를 잡고 예상하는 방식으로 해설 스타일을 바꿨다. 즉, 경기를 보는 각도를 그때그때 하나의 상황이 아니라 전체 흐름을 놓고 다음에 전개될 상황을 예측해 가는 식의 해설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예상이 빗나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 등줄기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공연히 모험하는 것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래도 계속 공부하고 반성하면서 내 스타일을 밀어붙였다. 한 5년쯤 지나자 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측이 거의 매번 들어맞으면서 확실한 자신감이 붙은 건 해설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그건 단순히 야구에 대한 지식만 갖고 되는 게 아니었다. 선수, 감독, 경기 전 양팀 분위기 등을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한 경기만 떼어놓고 보면 전문가나 일반인이나 큰 차별성이 없다. 경기의 흐름을 짚으려면 출전 선수들 개개인의 특성과 그날의 컨디션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감독의 성격은 물론이고 심판들의 성향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내가 타고난 ‘입심’만으로 해설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입심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입심이 한두 번은 통할지 몰라도 계속 먹힐 수는 없다.
요즘 시청자들이나 관중이 얼마나 똑똑한지 모른다. 야구 전문가가 따로 없다. 오히려 세부적인 기록이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팬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고 배운다. 해설이라는 전문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그만큼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솔직히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방식대로 공부하고 노력했다.
야구해설이 다른 스포츠 종목 해설과 다른 점이라면 매 이닝 흐름이 끊기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닝이 바뀌는 시간, 투수 교체하는 시간, 대타를 내는 시간 등등 이렇게 저렇게 경기 흐름이 끊기는 시간마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도 해설자가 할 일 중 하나다.
그러려면 감독이나 선수들에 관한 온갖 잡다한 정보도 알고 있어야 한다. 기록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혼자 1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도록 경기장 안팎의 모든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한다.
유능한 해설자는 입이 아니라 발로 해설한다. 말발이 제아무리 좋아도 다양한 정보와 그 정보들을 조합시키는 능력이 없으면 좋은 해설을 하기 어렵다.
나는 그간 고교야구 열정에 매료되기도 했고, 프로야구의 태동과 성장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 20여 년 동안 제법 인기 있는 야구해설자로 대접을 받았지만 해설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친구들로부터 ‘해설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까닭에 그때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글로써 친구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설하는 데 가장 큰 고?중 하나는 해설의 수준이다. 이 문제는 해설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후에도 떨치기 어려운 고민이다. 해설의 수준을 너무 높이면 대중성이 떨어지고, 너무 낮추면 전문성이 결여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맞추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말 그대로 이상적인 이야기다.
나는 김동엽 감독의 충고와 함께 방송의 대선배이신 오일용 복싱 해설위원의 조언을 내 해설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해설은 1%의 싸움이다.”
이 말은 해설자의 해설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100명의 시청ㆍ청취자 가운데 51%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다면 괜찮은 해설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설해도 절반의 동의는 얻겠지만, 거기서 나아가 1%의 동의를 더 얻어내야 비로소 성공한 해설자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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