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깊은 울림
20년 넘게 세상서 단절된 사색과
감옥 안팎 체험 바탕 인간을 이해
문명 성찰과 인간 해방 적극 모색
동서양 사상 통합 ‘관계론’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성으로
인간 생명ㆍ존재의 본질 찾아내
자본주의 소외를 극복하고 비판
사람이 최우선 ‘석과불식’ 교훈
사람에 담긴 가치를 폭넓게 이해
위로와 공감, 연대의식 깨닫게 해
더 나은 미래 여는 희망의 열쇠로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제도를 사유하여 담론으로 주조하는 이들을 사상가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 한나 아렌트와 정의로운 사회를 탐구한 존 롤스는 전후 서구사회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이런 사상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우리나라 지식인으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신영복이다. 신영복은 문명 성찰과 인간 해방을 추구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신영복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이 정밀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내 생각은 다르다. 까닭은 세 가지다.
첫째, 사상은 창의성을 요구한다. 신영복은 관계론이란 독창적 담론을 주조해 인간과 세계를 해석했다. 둘째, 사상은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신영복이 펼쳐온 인간과 세계 이해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안겨줬다. 셋째, 사상은 미래를 전망해야 한다. 신영복이 남긴 통찰은 개인적ㆍ사회적 차원에서 더 나은 미래를 여는 희망의 언어들을 선사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20년 20일 동안 복역했다. 1988년 8월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이후 성공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6년 신영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추모문을 썼다. “이 땅에 지식을 전하는 교수들은 많지만,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지 않다. 신영복 선생님은 (...) 교수이기 이전에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일러준 선생”이라고 적었다(‘신영복 선생을 떠나보내며’ㆍ본보 2016년 1월 18일자). 내게 신영복은 사람의 가치를 알려준 사상가였다.
‘사색’에서 ‘담론’으로
신영복의 이름을 널리 알린 저작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이다. 이 책은 20년 넘게 세상과 단절된 감옥 안에서 무한 고독을 견뎌낸 내면적 기록이다. 신영복의 언어는 명징하고 따듯하며 마음을 시리게 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를 끝없이 돌아보게 한다.
신영복 사유를 지탱하는 두 기반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철학적 관계론이다. 정치경제학은 한국 및 세계사회를 파악하는 그의 인식틀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키는 물신성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체제라는 게 그의 분석틀이다. 이 자본주의가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보는, 언제나 승패를 요구하는, 결국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존재론의 철학을 낳았다고 그는 비판한다.
관계론은 존재론에 대한 신영복의 사상적 대안이다. ‘나 아닌 다른 것들과의 관계성의 총체’가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룬다는 게 관계론의 핵심 아이디어다. 신영복에게 관계론은 자본주의의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상적 거점이다.
관계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이 ‘나의 동양 고전 독법’이 부제인 ‘강의’(2004)다. ‘강의’는 ‘시경’에서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동양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들을 관계론의 관점에서 탐구하고 재해석한다. 신영복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에서 찾는다.
이러한 사색과 탐구가 집약된 책이 2015년에 출간한 ‘담론’이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가 부제로 달려 있다. 이 저작에서 신영복은 앞서 발표한 저작들을 주요 텍스트로 하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이론에 넓이와 깊이를 더한다.
인문학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공부라면, 신영복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공부인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각성이면서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여행’이 공부의 출발점이고, ‘비근대의 조직과 탈근대의 모색’을 추구하는 게 그 종착점이라는 것이다.
‘담론’은 이러한 사유의 긴 여행을 다룬다. 정치경제학과 동양 고전에 대한 재해석이 신영복의 세계 인식을 이룬다면, 감옥 안과 밖의 체험 및 사색이 그의 인간 이해를 구성한다. 관계를 모든 담론의 중심에 놓아두고, “나와 세계, 아픔과 기쁨, 사실과 진실,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 자기 개조와 연대, 그리고 변화와 창조”에 대한 신영복 특유의 사유를 펼쳐 보인 저작이 ‘담론’이다.
문명 성찰과 인간 해방의 사상
신영복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문집인 ‘신영복 함께 읽기’에서 나는 신영복 사상을 ‘인간 해방적, 문명 성찰적 진보주의’라 명명한 바 있다. 신영복에게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 담론이며, 관계론은 인간 이해에 대한 해방 담론이다. 성찰을 통한 해방을 치열하게 모색해온 지적 여정이 신영복이 걸어온 사상의 모험이다.
문명 성찰과 인간 해방에 대한 신영복 사상은 우리 지성사에서 이채로운 것이다. 대다수 지식인들이 서구 사상에서 자신의 인식틀을 빌려온다면, 신영복은 사유의 실마리를 서구 사상은 물론 동양 사상에서 구한다. 자신에게 중요했던 책에 관한 질문에 신영복은 “‘논어’는 인간에 대한 담론이고,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관한 이론이고, ‘노자’는 자연에 대한 최대 담론”이라고 응답한 바 있다.
‘담론’에서 주목할 것은 비근대의 조직과 탈근대의 모색에서 신영복이 질 들뢰즈,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에드워드 사이드의 사상을 다룬다는 점이다. 공존과 관용을 넘어서 변화와 탈주의 사상으로 관계론을 심화시키려는 그의 사유의 확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서양 사상의 이러한 융합을 좀 더 가다듬지 못한 채 안타깝게 신영복은 우리 곁을 떠났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신영복이 남겨준 화두다.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를 뜻하는 석과불식은 20년의 수감 생활을 견디게 했던 희망의 언어다. 석과불식의 교훈은 사람에 담긴 가치의 발견에 있다. 그는 말한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경제·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사람이 ‘처음이자 끝’이라는, 사람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신영복의 사상은 새로운 게 아닐 수 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인류가 사상을 주조하기 시작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주장해온 바다. 그러나 이 가치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사람의 가치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신영복 사상은 우리 지성사의 오래된 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로와 공감과 연대를 위하여
인간에 대한 탐구는 지난 20세기 매우 중대한 학문적 주제였다. 에드워드 윌슨이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주목했다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탐구했다. 알프레드 슈츠는 생활세계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했고, 위르겐 하버마스는 노동하고 소통하는 인간을 부각시켰다.
오늘날 인간은 어느 한 인식틀로만 파악할 수 없는 복합적 존재다. 인간을 넓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생물학ㆍ철학ㆍ심리학ㆍ사회학 등의 공동 연구가 필요한 셈이다.
인간학의 관점에서 신영복의 사상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관계론이다. 관계론은 인간의 사회적 성격을 고려할 때 타당한 견해다.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과 앤서니 기든스의 ‘구조와 행위의 이원성’과 닮아 있는 담론이다.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발견과 성찰은 신영복 사상의 가장 중요한 성취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강의’를 거쳐 ‘담론’까지 신영복의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그로부터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 먼저 떠오른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된 비판과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였다. 이와 더불어 내가 발견한 것은 위로와 공감과 연대의식이었다. 신영복 저작들은 내게 위로를 선사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연대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사상이 갖춰야 할 제일의 덕목이다. 하지만 이 못지않게 사상은 위로와 공감과 연대의식을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깊이 있는 인식에 따듯한 공명(共鳴)을 더하는 것은 사상의 미래에서 무엇보다 염두에 둬야 할 지식인의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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