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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피로 물든 텐안먼광장

입력
2016.06.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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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새벽, 10만에 가까운 인민해방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텐안문광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해 4월, 중국공산당 전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사망한 후 학생과 노동자들은 청렴파 후야오방의 재평가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일반 시민과 지식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됐다.

5월 17일, 중국을 방문 중이던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텐안먼광장 내 인민영웅기념비 헌화마저 시위대로 인해 취소되자 중국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은 강경파였던 리펑 총리에게 강력진압을 명령했다. 학생들의 편에 서서 눈물로 시위자제를 호소하던 후임 총서기 자오쯔양은 가택 연금됐고 무자비한 탱크부대가 광장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인민의 군대였던 인민해방군의 습격으로 중국의 마당이었던 텐안먼광장은 붉은 피로 물들었고 50여 일에 이르는 중국인민들의 민주화 시위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다음날 인민일보는 “텐안먼광장에서 사망자는 없었고 수도에서 반혁명동란이 발생해 폭도들이 군인과 전투를 벌여 300여 명이 사망했다”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외신 발표는 7,000명이었다. 시위대를 주도했던 학생대표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고 실권자 덩샤오핑은 상하이출신 장쩌민을 총서기에 앉힌 후 그 해 가을 당 중앙군사위 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1989년 6월 4일 텐안먼에 진입하는 탱크부대를 한 청년이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다. 탱크맨으로 유명한 이 사진의 주인공은 후난성 출신 왕웨이린으로 밝혀졌다.

손용석 멀티미디어부장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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