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표향 기자

등록 : 2018.05.24 04:40

“다섯 살에 이민… 영화 속 벤처럼 늘 외로움 느껴”

영화 ‘버닝’에서 미스터리한 상류층 연기해 호평

등록 : 2018.05.24 04:40

‘버닝’서 벤 연기한 스티븐 연

한국과 미국 경계에서 힘든 시간

두렵지만 알 수 없는 힘 생겨

한국인 연기는 내겐 특별한 의미

연기 통해 연민을 배우고 있는 중

지난해 ‘옥자’에 이어 ‘버닝’으로 2년 연속 칸국제영화제를 방문한 스티븐 연은 “칸에서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니 한국에서 촬영했던 시간이 떠올라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제71회 칸국제영화제가 막바지를 향해 가던 지난 16일(현지시간) 영화 ‘버닝’ 공식 상영을 마치고 관객을 마주한 배우 스티븐 연(35)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묵직하고 뜨거운 갈채가 그를 감쌌다. 지난해 ‘옥자’에 이어 2년 연속 칸의 레드카펫을 밟았지만 그에게 ‘버닝’은 조금 더 특별했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영화가 이렇게 크고 진실하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무척 놀라웠고 감동 받았어요.” 칸 현지에서 호평이 쏟아지던 지난 18일 마주한 스티븐 연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되감았다.

‘버닝’에서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상류층 청년 벤을 연기한다. 벤은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해미(전종서)를 가운데 두고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에게 무력감을 안기는 존재이자 미스터리한 세상 그 자체다. 벤의 여유로운 표정 뒤로 언뜻 비치는 무료함이 스크린에 불길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창동 감독에게 출연을 제안 받은 자리에서 스티븐 연은 “나는 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벤은 미국식 이름이지만 완전한 한국인이다. “벤에게서 외로움을 느꼈어요. 종수와 해미가 느끼는 외로움과는 조금 다른 것이죠. 다 가졌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이랄까요. 세 캐릭터는 외로움으로 연결돼 있어요. 저도 재미동포로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늘 품고 있었어요. 이번에 한국 사람을 연기하면서 그 외로움이 연기에 담겨 표현된 것 같아요.”

영화에서 종수는 벤을 ‘위대한 개츠비’에 비유한다. 부유함이 곧 직업이고 정체성인 남자. 스티븐 연에게 벤은 “규칙이 없는 사람, 그래서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벤에겐 일상이 무료할 겁니다. 그러니 허상 같은 재미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겠죠.”

특별한 직업이 없는데도 부유한 정체불명의 남자 벤은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며 이야기를 미스터리 스릴러로 몰아 간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다섯 살에 이민을 간 스티븐 연은 한국과 미국의 경계에 선 자신을 돌아보며 외로움이란 정서를 길어 올렸다. 4개월간 한국에서 촬영하면서 그 외로움을 즐겼다. 외로움이 그에게는 힘이었다. “미국의 일부가 되기도 힘들고 한국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힘든 시간이 있었어요. 처음엔 두려웠지만 그 시기를 넘기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깁니다. 더 용감해지고 넓어지게 되죠. 제가 지금 그런 거 같아요.”

그에게 한국 영화에서 한국 정서를 한국어로 연기한다는 건 특별한 의미였다. “미국에서 저는 동양인 스티븐일 뿐이고 캐릭터도 제한되니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벤은 동양인 벤이 아니라 그냥 벤이잖아요. 완전한 자유를 느꼈어요. 앞으로 연기할 때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벤 역할에 스티븐 연 말고는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 경계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이 영화에 자욱한 안개를 덧씌운다. 이창동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스티븐 연도 ‘옥자’ 개봉 당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감독과 꼭 한번 작업하고 싶은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 감독에 대해 “대단한 선생님이면서 여전히 세상을 배우려는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분이 다시 젊음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옆에서 보고 배우는 게 정말 많았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걸 내려놓을 수 있을까. 감독님은 그럴 수 있는 분이셨어요. 그런 분과 작업했다니 정말 행운이에요. 칸영화제에 초청돼서가 아니에요. 영화제는 그냥 영화제일 뿐. 저에겐 감독님, 유아인, 전종서와 함께한 시간이 가장 소중합니다.”

스티븐 연을 한국 영화에서 계속 만나고 싶다. 그 또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재미동포 같은 캐릭터에만 갇히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제 것이 아닌 연기를 하면 관객들도 재미없게 느낄 거예요. 벤은 제 것이라 느꼈어요. 마찬가지로 한국 감독을 택한 게 아니라, 이창동과 봉준호를 택한 거예요. 두 분을 통해 더 넓어지고 깊어진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스티븐 연은 왜 배우의 길을 택했을까. 조금은 추상적인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글쎄요. 시작은 호기심이었는데 지금은 연민인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자아가 강해서 크게 상처받지 않았지만, 그만큼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연기를 통해 비로소 연민을 배웠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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