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 장소에 살았다. 그 중 기억나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데도 있다. 이를 테면 부모님이 신혼살림을 꾸린 인천 수도국산, 그 사십여 년 전 서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천전기며 오스카극장, 엄마가 기저귀 23개 가지고 하루에 빨래 3번하며 아이 셋을 키웠다는 단칸방은 내 기억에 없다. 그 공간들은 내게 순전히 ‘이야기’의 형태로 몸에 남아있다. 그 다음 방 또 다른 셋방도 마찬가지다. 모두 내가 서너 살 전 겪은 곳이라 그럴 것이다. 반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나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오는 장소가 있다. 이제껏 경험한 거주 공간 중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곳, ‘맛나당’이다.
‘맛나당’은 내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판 가게다. 우리 가족은 그 국숫집에서 8년 넘게 살았다. 머문 시간에 비해 ‘맛나당’이 내게 큰 의미를 갖는 건 거기서 내 ‘정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때론 교육이나 교양으로 대체 못하는, 구매도 학습도 불가능한 유년의 정서가. 그 시절, 뭘 특별히 배운다거나 경험한다는 의식 없이 그 장소가 내게 주는 것들을 나는 공기처럼 들이마셨다.
점심때면 ‘맛나당’에 수많은 손님과 더불어 그들이 몰고 온 ‘이야기’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국수는 ‘빠른 음식’이라 면이 퍼져도, 국물이 식어도 안 됐다. 그곳에서 나는 여러 계층과 계급,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 군상과 공평한 허기를 봤다. 요리가 미덕이고 의무이기 전에 노동인 걸 배웠고, 동시에 경제권을 쥔 여자의 자신만만함이랄까 삶이 제 것이라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긍지로 빛나는 것 또한 봤다. 당시 어머니는 ‘돈 버는 게 재밌었다’했다. ‘젊어 하루 쉬는 게 늙어 보약 몇 채 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어른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신이 났다고. 손님이 하도 많아 하루에 밀가루 두 포대를 개어본 적도 있단 말을 자랑처럼 흘렸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세 딸을 가르치고, 생활을 꾸리고, 나중에는 집도 샀다. 집이란 걸 처음 사보는지라 실 평수를 듣고도 가늠 못하다 나중에 건물이 다 지어진 걸 보고서야 집이 너무 좁은 걸 알고 실망했다고. 몇 년 살다 더 큰 데로 옮기려 했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돈이 잘 안 벌리더라’는 말도 희미하게 보탰다. 잠깐 맛본 삶의 절정이랄까, 호시절이 그렇게 짧을 줄 몰랐다는 말을, 평생 밀가루 묻혀 기름기 하나 없는 손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당시 번 돈을 모두 생활에 쏟아 부은 건 아니다. 지금도 나는 방문판매원이 가져온 아름다운 화장품 병을 유심히 살펴보던 어머니의 젊은 옆얼굴이며, 남대문시장에서 수입품을 떼다 팔던 아주머니에게 어머니가 ‘비전 냄비’나 ‘코끼리 보온도시락’을 비롯해 특이한 그릇과 카펫을 주문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식당 홀과 마주한 딸들 방에 피아노까지 놔주셨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어머니는 밥장사를 하면서도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기꺼이, 아무 의심 없이, 딸들에게 책을 사줬다. 동시에 자기 옷도 사고 분도 발랐다. 손님 없는 한적한 오후, 홀과 마주한 작은 방에 누워 내게 ‘따오기’나 ‘고향땅’을 청하던 엄마 얼굴이 지금도 기억나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거다. 피아노 연주에 맞춰 허공에서 발 박자를 맞추던 엄마 작은 발이랄까 설거지물 밴 양말 앞코가 종종 떠오르는 것도. 우리 가족은 재래식 화장실과 영창피아노가 공존하는 집에 살았고, 훗날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칼자국’과 ‘도도한 생활’ 같은 단편을 쓸 수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갑자기 왜 국수가게 할 마음을 먹었느냐’고 물은 적 있다. 어머니는 어떤 계기로 ‘저러다 남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 있어야지’라는 할머니의 청을 거절하고 아이를 더 낳는 대신 국수가게를 차렸다. ‘본가에 들어와 살림과 농사를 맡으라’는 요구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렸다. 어머니가 종일 밭을 매고 고추를 따는 사이 하루 두 번 씻겨 늘 깨끗하던 우리 몸에 이가 생기는 걸 목도하고서였다. 어떤 관계에선 ‘식구니까’ 혹은 ‘식구끼리’라는 말이 줄곧 일방통행으로 쓰인다는 걸 깨닫고서였다. 어머니는 훗날 삶이 자신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멱살을 쥐어 잡고 흔드는 와중에도 국수를 썰며 각기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던 세 딸의 학비와 방세, 생활비를 모두 대셨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우리에게 생계를 책임지란 말을 하지 않았다. ‘맛나당’은 내 어머니가 경제적 주체이자 삶의 주체로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가방끈이 짧았지만 상대에게 의무와 예의를 다하다가 누군가 자기 삶을 오려가려 할 때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고, 내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인 상이랄까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나는 내가 본 게 무언지 모르고 자랐지만 그 공간에 밴 공기를 오래 쐬었다. 타닥타닥 타자치는 소리와 비슷하게 평온하고 규칙적인 도마질 소리를 들으며 밀가루를 먹고 무럭 자라 열아홉이 되었다.
고3 여름방학 때 나는 사범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몰래 예술학교 시험을 봤다. 그건 내가 부모에게 한 최초의 거짓말은 아니었을지라도 결정적 거짓말이었다. 나를 키운 8할의 기대를 배반한 작은 2할, 나는 그게 내 인생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릴 때까지 내 몸과 마음을 길러준 8할, 갈수록 뼈가 닳고 눈과 귀가 어두워져 가는 그 8할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어릴 땐 꿈이 덤프트럭 기사였고, 아는 것 적고 배운 것 없지만 ‘그게 다 식구니까 그렇지’라는 말로부터 멀리 달아나셨던 분, 그렇지만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하신 분, 내겐 한없이 다정하고 때로 타인에게 무례한, 복잡하고 결함 많고 씩씩한 여성. 그리고 그녀가 삶을 자기 것으로 가꾸는 사이 자연스레 그걸 내가 목격하게끔 만들어준 칼국수 집, ‘맛나당’이 나를 키웠다. 내게 스몄다.
김애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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