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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원양어선 ‘지남호’를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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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원양어선 ‘지남호’를 기억하시나요

입력
2017.06.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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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27명 선원 부산항 출발

참치조업으로 외화 벌이 선봉

오늘 원양어업진출 60돌 기념식

당시 선장 금탑산업훈장 받아

1957년 6월 29일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의 선원들이 선상 출항식을 하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1957년 6월 29일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의 선원들이 선상 출항식을 하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영화 ‘국제시장’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였던 덕수(황정민 분)와 영자(김윤진 분)의 눈물 겨운 타향살이를 다뤘다. 눈부신 ‘한강의 기적’은 이역만리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외화벌이에 매달린 수 많은 덕수와 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고국을 떠난 산업역군들이 있었다. 60년 전인 1957년 6월29일 부산항을 출항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에 올랐던 선원 27명이다. 올해 지남호 출항 60주년을 맞아 지남호를 지휘했던 윤정구(90) 선장과 이제호(89) 어업지도관이 각각 금탑산업훈장과 대통령표창을 받게 됐다. 29일 부산 영도구 동삼동 국립해양박물관에서는 ‘원양어업 진출 60주년 기념식’도 열린다.

지남호는 해무청(현 해양수산부)과 제동산업이 미국 대외원조처의 지원을 받아 참치 조업 시험 사업을 기획하며 탄생했다. 46년 미국 시애틀에서 건조된 ‘SS 워싱턴 호’를 들여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富)를 건져오라’는 뜻으로 지남(指南)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지남호에 희망을 담았다. 출항 당일 부둣가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부는 배를 빌려 오륙도까지 나가 지남호와 선원들을 뜨겁게 환송했다. 지남호 선원들이 우여곡절 끝에 첫 어획에 성공한 날이 출항 48일째인 8월15일 광복절인 점도 의미를 더했다.

시험 조업에 이어 발전을 거듭한 원양어업은 71년 총 수출액의 5%(5,510만달러)를 차지할 정도의 효자 산업으로 성장했다. 원양어업으로 잡은 오징어와 꽁치가 국민 밥상에 오르면서 대중 생선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때다. 1달러의 외화도 소중하던 시절, 산업역군들이 국가경제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송금한 돈이 국제수지 개선과 국민소득 향상, 한국경제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원양어선 선원들의 업적은 아직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는 지남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60주년 기념비 제작을 목표로 지난 4월 한 포털 사이트에서 스토리펀딩(창작물이나 연재물을 싣고 자금을 지원받는 서비스)을 진행했다. 기념비 제작 비용의 60%인 3,000만원을 목표 액수로 잡았지만 360만원이 모인 게 전부였다. 그만큼 원양어업에 ‘무심’하다는 이야기다. 김현태 한국원양산업협회 이사는 “원양어업으로 목숨을 잃은 선원 300여명이 아직도 타국에 묻혀있고 실종 선원까지 합치면 전체 희생자는 배도 넘는다”며 “이들의 기여가 잊혀지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지남호를 20분의 1크기로 복구한 모형.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지남호를 20분의 1크기로 복구한 모형.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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