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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화양연화…왜곡된 시공간을 오르다

입력
2017.04.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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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 냄새에 끌려가니, 민트 아이스크림이 녹아있었다. 해발 2,381m의 엘살바도르 산타 아나 화구호(火口湖). 볼을 꼬집어봐도 정말 그랬다.

검게 그을리거나 피멍이 나거나 누렇게 뜨거나. 화산 폭발이 남긴 암벽의 컬러도 변화무쌍하다.
검게 그을리거나 피멍이 나거나 누렇게 뜨거나. 화산 폭발이 남긴 암벽의 컬러도 변화무쌍하다.

평소 트레킹에 1할도 관심이 없었건만, 중남미 여행은 트레킹을 종용한다. 걸어야 하고, 그게 또 여행이다. 엘살바도르의 서쪽 도시 산타 아나(Santa Ana)에 짐을 풀었다. 으리으리한 콜로니얼(스페인 식민지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과 붉은 야간업소 거리가 팽팽히 공존하는 곳, 노동의 낮에서 환락의 밤으로 빠르게 치환되는 곳, 이곳으로부터 산타 아나 화산에 오를 예정이다. 가는 길은 제법 쉽고 싸지만, 노곤하다. 시내 터미널에서 오전 7시 30분 발 버스를 타야만 (가이드가 필수인) 트레킹에 참여할 수 있다. 버스 종점이 곧 트레킹의 시작점이다. 도시의 때를 벗은 지 1시간 반이 지날 무렵, 화산의 파라다이스는 덜컹덜컹 다소 투박하게 다가왔다.

덜컹덜컹 통증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로컬 버스. 뜯겨나간 시트는 중남미에 대한 요상한 그리움 중 하나다.
덜컹덜컹 통증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로컬 버스. 뜯겨나간 시트는 중남미에 대한 요상한 그리움 중 하나다.
현지인에게 공식 명칭으로 이곳 위치를 물었다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 '세로 베르데'가 대중화된 명칭이다.
현지인에게 공식 명칭으로 이곳 위치를 물었다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 '세로 베르데'가 대중화된 명칭이다.

이름 정리부터 해야겠다. 도착한 곳은 공식적으로 '화산들의 국립공원(ParqueNacional Los Volcanes)'이란 명칭이 있지만, 현지인 사이에선 '세로 베르데 국립공원(Parque Nacional Cerro Verde)'으로 통용된다. 엘살바도르 국립공원 중 가장 면적이 큰 만큼 자신 있게 내놓은 자식이 셋이다. 산타 아나(Santa Ana), 이잘코(Izalco), 그리고 세로 베르데(Cerro Verde) 화산. 이잘코는 일라마테펙(Ilamatepec) 화산으로도 불린다.

오늘의 목적지는 산타 아나 화산이다. 1520년 폭발한 이후 12차례 이상 크고 작게 분화했던 화산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소행성의 활화산 중 하나가 여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졌다(극중 '장미' 캐릭터는 그의 살바도르인 아내). 높기도 가장 높다.

주차장 옆 전망대. 운무가 그날의 운명을 결정한다. 무엇을 볼지, 보지 못할지.
주차장 옆 전망대. 운무가 그날의 운명을 결정한다. 무엇을 볼지, 보지 못할지.
원뿔형 이잘코 화산. 250년 가까이 된 산이지만, 이곳에선 막내로 통한다. 억울할까?
원뿔형 이잘코 화산. 250년 가까이 된 산이지만, 이곳에선 막내로 통한다. 억울할까?
영화 ‘가위손’의 에드워드가 다녀간 듯한 정원수 조각공원이자 주차장. 해발 1,952m인 이잘코 화산은 사진 어디에도 대롱대롱 걸린다.
영화 ‘가위손’의 에드워드가 다녀간 듯한 정원수 조각공원이자 주차장. 해발 1,952m인 이잘코 화산은 사진 어디에도 대롱대롱 걸린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해발 2,030m 이잘코 화산 전망대다. 이잘코 화산은 1770년 폭발로 태어난 잘생긴 원뿔 형태다. 세 자식 중 막내 뻘로, 왕년엔 160년간 자연 봉수대로 활약할 만큼 불길이 활활 치솟았다. '태평양의 등대'로 불렸지만 현재는 소심하게 화산 가스를 풍기고 있다.

산타 아나 트레킹은 하루 단 한 번, 오전 11시 그룹 투어로만 진행된다. 자연보호와 보안(특히 강도)을 이유로 가이드와 경찰이 동반해야만 오를 수 있다.

"화산 갈 거지? 따라와."

등산할 타이밍에 하산하는 가이드를 버리고 샛길을 찾아보았지만, 칠흑 같은 숲 속.
등산할 타이밍에 하산하는 가이드를 버리고 샛길을 찾아보았지만, 칠흑 같은 숲 속.
국립공원 내 사유지가 있어 통행만으로 1달러 착취, 부자가 돈방석에 앉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국립공원 내 사유지가 있어 통행만으로 1달러 착취, 부자가 돈방석에 앉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딱따구리와 벌새, 투칸 등 새들의 안식처인 숲이 보이면 트레킹의 진정한 시작. 푯말로 새를 배운다.
딱따구리와 벌새, 투칸 등 새들의 안식처인 숲이 보이면 트레킹의 진정한 시작. 푯말로 새를 배운다.

가이드의 꽁무니를 따라가는데 시작부터 사기가 꺾였다. 두 손을 불끈 쥐고 좀 오른다 싶더니 터무니없이 하산이다. 급기야 올라가야 할 길이 까마득한 곤두박질 형 내리막길이다.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될 즈음엔 이런저런 명목으로 관광객의 고혈도 짜냈다. 입장료 3달러 외에 사유지 통행료, 가이드 및 경찰 인건비, 보호 유지비 등을 포함해 8달러!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 털어간다는 의심이 강하게 고개 들었을 때, 뒤따르는 무장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이쯤 되면 등반의 원동력은 분노 아니면 오기다.

화산이라 쓰고 늘 푸른 정원이라 읽는다. 밀도 높은 산허리 둘레길에선 반 토막 난 사람이 떠다닌다.
화산이라 쓰고 늘 푸른 정원이라 읽는다. 밀도 높은 산허리 둘레길에선 반 토막 난 사람이 떠다닌다.
죽음이 눈앞인 삶, 죽음에 다가가는 삶, 화양연화의 삶. 노란 꽃을 피우고 세상과 이별하는 마게이(maguey).
죽음이 눈앞인 삶, 죽음에 다가가는 삶, 화양연화의 삶. 노란 꽃을 피우고 세상과 이별하는 마게이(maguey).
검게 그을린 대지가 펼쳐지고, 그 대지의 주인이 마게이가 될 때 정상이 코 앞이다.
검게 그을린 대지가 펼쳐지고, 그 대지의 주인이 마게이가 될 때 정상이 코 앞이다.

트레킹의 초입은 들숨과 날숨을 적당히 조절할만한 경사다. 들풀과 들꽃은 가빠진 호흡에 기쁨의 코러스를 넣었다. 다양한 새 그림 안내판과 풍경은 봄이거늘, 어찌 여물어가는 초가을의 냄새로 일렁일까. 키 높은 나무가 지붕을 이룬 적막한 숲이 하늘에 노출된 순간, 길게 테를 두른 둘레길이 시작된다. 강아지풀이 무릎을 간질간질, 초롱꽃은 고개를 살랑살랑, 세상의 만물이 속삭인다. 오를수록 화원이다.

화원의 터줏대감은 마게이(maguey, 용설란과, 아메리칸 알로에)다. 지상에 박힌 별이라 부를 만하다. 잔뿌리를 땅속에 박은 마게이는 대나무 같은 줄기를 쭉 뻗어 샛노란 실타래 꽃을 피운 뒤 생을 마감한다. 여기가 마게이의 자궁이요, 곧 무덤이다. 그 사이 배신감이 들 만한 급경사가 이어지고, 올라도 올라도 제자리를 걷는 듯한 악몽도 현실이 된다. 한 자리에서만 평생을 사는 마게이는 얼마나 위태롭고 경이로운가. 우리도 숨을 깔딱깔딱 댔다.

분화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정상이기에 더 아름다운 법.
분화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정상이기에 더 아름다운 법.
인간은 자연 아래 미물이로다. 자칫 무게 중심을 잃으면 호수의 제물이 되기 딱 좋다.
인간은 자연 아래 미물이로다. 자칫 무게 중심을 잃으면 호수의 제물이 되기 딱 좋다.
보호막도 경고 표지판도 하나 없는 순결한 화산. 빛과 구름의 참견에 예민하게 표정을 바꾼다.
보호막도 경고 표지판도 하나 없는 순결한 화산. 빛과 구름의 참견에 예민하게 표정을 바꾼다.
에메랄드그린 컬러는 풍부한 유황의 은덕이다. 솔솔 피어나는 김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온도일 수도.
에메랄드그린 컬러는 풍부한 유황의 은덕이다. 솔솔 피어나는 김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온도일 수도.

황량했다. 척박한 사막이다. 마게이도 사라지고, 생명력이 있는 것은 모두 뒤로 빠졌다. 일행의 말수도 먼지처럼 줄어들었다. 슬금슬금 풍겨오는 유황 냄새만이 그곳으로 안내하는 목자다. 불과 100m 앞, 분화구의 능선에 선 일행이 손톱만한 크기로 보였다. 타원형 분화구엔 긁히고 할퀴고 쏠린 지층의 상처가 그대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화구호. 침을 꿀꺽 삼켰다. 촉감은 어떨까, 유화 물감처럼 반투명일까, 우유가 듬뿍 들어간 민트 아이스크림 컬러라 하면 믿어줄까. 300m 깊이라 했다. 회오리 치는 바람은 부지런히 화구호로 자갈 돌을 데려갔다. 질감도, 형태도, 컬러도 이국적이라 왜곡된 시공간에 상륙한 기분이다. '초월'이란 표현도, 헛된 과장은 아닐 것이다.

2시간여 기다림 끝에 버스를 타고 산타 아나로 돌아왔다. 스낵으로 점심을 때운 우리는 중앙공원(Parque Central)의 길거리 음식점으로 직진했다. 토르타스(tortas, 각종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류)가 팔뚝만 한 크기여서 하나만 주문했다가 결국, "같은 거로 하나 더요!" 라고 외쳤다. 배는 슬슬 분화구 모양이 되어갔다. 정상 정복의 쾌감은 엉뚱하게도 그 날의 끝자락에 찾아왔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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